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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r 08. 2019

간략 삼국지(30)

영걸무상(英傑無常)


☐  혼절하는 한중왕 유비          


천하영웅 관우를 제거하고 [형주]와 [양양]까지 되찾은 손권은 기뻐했다. 큰 공을 세운 여몽이 지난날 적벽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유보다 낫다 칭찬하며 술잔을 권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어 술잔을 받던 여몽이 갑자기 술잔을 내던지고 손권의 멱살을 잡더니 욕지거리를 해댔다. 


이어 여몽손권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눈을 부릅뜨며 자신은 관운장이라며 호통을 쳤다. 놀란 손권 관우의 혼령을 뒤집어 쓴 여몽을 향해 절을 올리자, 여몽은 눈 코 입으로 피를 쏟으며 죽어버렸다. 여몽의 죽음으로 인해 손권은 두려움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몽(呂蒙)

그런 어느 날 손권에게 장소가 찾아와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복수하러 올 것에 대비해, 관우의 머리를 나무상자에 담아 조조에게 보내라고 일렀다. 유비가 조조와 손을 잡고 [동오]를 칠 수 있으니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바치고, 유비에게는 이번 일을 조조가 꾸며서 한 것처럼 하자는 계략이었다. 


손권은 장소의 말에 감탄하며 관우의 머리가 든 나무상자를 조조에게 보냈다. 한편 조조는 [동오]의 사자가 관우의 머리를 가져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이 일이 [동오]의 계략임을 일깨우며, 관운장의 목에 좋은 향나무로 몸을 깎아 붙인 뒤에 예로서 장사를 지내주도록 했다. 


장소(張昭) / 사마의(司馬懿)

따라서 유비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손권을 원망하며 [동오]를 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조조 사마의에 말을 따르기로 하고 상자를 열어보니, 관우의 얼굴이 놀랍게도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조조가 우스갯소리로 그 동안 별고 없었느냐고 묻자, 갑자기 관우가 입을 벌리며 눈을 부릅떴다. 


기겁을 해 까무러친 조조는 크게 두려운 나머지 관우를 왕후의 예를 갖춰 [낙양성] 남문 밖에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 무렵 유비는 [중]을 평정하고 [성도]로 돌아와 새 왕비 오씨를 맞이했다. 오비는 이후 유영 유리 두 아들을 낳았다. 


관우(關羽) 혼령

그러던 어느 날 연이어 [형주]의 소식이 전해졌다. 관우조조의 칠로군과 싸워 크게 이겼고, 봉화대를 쌓아 [동오]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비는 기뻐하며 마음을 놓고 지냈다. 하루는 유비가 기이하고 불길한 관우의 꿈을 꾸고는 공명에게 들려주었다. 


유비를 겨우 안심시키고 난 뒤 물러나온 공명은 곧 태부 허정으로부터 관우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문득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던 유비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마량 이적이 달려와 [형주]가 여몽에게 함락됐을 알리고 관우가 써 준 글을 바쳤다. 


이때 요화도 달려와 유봉 맹달이 구원병을 거절했다고 알렸다. 유비는 눈물을 쏟으며 장비에게 관우의 위태로운 소식을 알리고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했다. 하지만 날이 밝아질 무렵 관우가 사망한 소식을 다시 전해들은 유비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허정(許靖) / 요화(廖化)

유비는 사흘이 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목 놓아 울다가 피까지 토했다. 공명유비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낙양]의 소문을 알려주었다. 손권이 자신의 화를 조조에게 떠넘기려하자, 조조손권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관우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는 형왕(荆王)의 칭호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격분한 유비가 즉시 손권을 치려했으나 공명 만류하며, [위]와 [동오]가 다투기를 기다려 군사를 내기를 거듭 권하였다. 유비도 마침내 군사를 내는 일을 뒤로 미루고 관우의 장례부터 치렀다. 그 무렵 [낙양]에 있던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고 놀란 뒤, 눈만 감으면 관우의 모습이 어른거려 마침내 병을 얻어 눕게 되었다. 


조조는 영을 내려 널리 용한 의원을 불러 치료했지만, 머리가 쑤시고 아픈 증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조조 화음이 천거한 명의 화타를 모셔오게 했다. 조조의 맥을 짚어 보던 화타는 병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날카로운 도끼로 두개골을 열어 골에 괸 바람기를 씻어내 한다고 말했다. 


화타(華陀)

도끼로 머리를 쪼개야 한다는 말에 조조는 화를 내며 화타를 의심부터 했다. 그런데 화타는 관우가 독화살로 난 상처를 치료받을 때 의연했던 모습을 이야기해 주었다. 조조는 자신과 관우를 견주는 말에 더욱 화가 뻗쳐 화타를 꾸짖더니,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수작이라며 화타를 감옥에 가두게 했다.


☐  한줌 흙으로 돌아간 조조 


화타는 날마다 엄한 문초를 받았는데, 이때 자신에게 몰래 술과 음식을 대접해주던 옥졸 오압옥에게 자신의 비방서(秘方書)를 전해주고 모진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다. 오압옥이 옥졸을 그만두고 의원이 되려하자, 그 아내는 비방서를 불사르고 말았다. 이로 인해 화타의 비방서는 세상에 전해지지 못했다. 



조조화타가 죽은 후로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때 손권조조에게 글을 보내와, 조조가 속히 천자의 자리에 오른 후 유비를 평정하면 자신은 곧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하겠다고 전했다. 이에 문무관원들도 조조가 하루빨리 천자의 자리에 오르도록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조조는 천명이 자신에게 이른다면 자신은 주(周)의 문왕(文王)과 같으면 족하다고 말했다. 이는 조조가 끝내 한(漢)나라를 섬기겠지만, 자신의 아들은 천자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조조는 사마의에 제안에 따라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손권을 표기장군에 [형주목]으로 삼은 뒤 유비를 막도록 했다. 


천자의 조칙을 손권에게 전하게 한 조조는 큰 걱정거리를 덜었으나, 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자꾸 헛것이 보였다. 지난날 자신에게 끔찍한 죽임을 당한 복황후동승이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괴롭혔다. 조조는 몸을 떨며 칼을 뽑아 허공을 향해 후려치더니, 뒷걸음을 치다 넘어지기까지 했다. 

     

조조(曹操)

조조는 스스로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알고 다시 조홍을 비롯한 대신들을 불러 조용히 뒷일을 당부했다. 조조는 자신이 천하를 누빈지 30여 년에 모든 영웅들을 평정했지만 손권유비가 남았으니, 자신의 네 아들 중 맏아들 조비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이루게 하라며 후사를 정해 주었다. 


또한 뒷날 사람들이 자신의 시체를 파헤칠까 염려하여 거짓무덤 일흔 개를 만들도록 정한 후 긴 탄식과 함께 눈물을 쏟더니, 건안 25년(220년) 정월, 예순여섯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세의 영웅호걸이며 무장으로서나 치자(治者)로써 당대의 으뜸가는 조조였지만, 그의 마지막 길은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니 세상사 인생무상의 이치(理致)였다. 



화흠은 조조의 상중(喪中)임에도 헌제에게 조서를 강요해, 그날로 조비를 위왕으로 삼고 승상을 겸하도록 했다. 조비는 건안 25년의 연호를 연강 원년(220년)으로 고치고, 문무백관들의 벼슬을 올리어 사기를 드높였다. 조비조조의 시호를 무왕으로 정하고, 우금으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했다. 


조비는 조조 무덤의 흰 벽에 관운장이 칠로군을 무찔렀을 때의 광경을 그려 넣게 했는데, 관우 앞에 꿋꿋이 버티고 있는 방덕과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우금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우금은 그림 속에 그려진 자신을 꼴을 보며 부끄러움과 괴로움으로 병을 얻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말년 우금(于禁)

조조의 둘째 아들 조창은 자신의 군마를 조비에게 바치고 복종을 다짐했으나, 셋째 조식과 넷째 조웅은 문상을 오지 않았다. 조비가 사자를 보내 장례에 오지 않은 죄를 묻자, 병약한 조웅은 두려움에 자살을 하고 조식은 날마다 술을 마시며 형제간의 죄를 묻는 형을 오히려 원망하고 있었다. 


격분한 조비는 허저를 보내 조식의 무리를 잡아오도록 했다. 허저가 [임치성]에 이르러 성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식은 술에 취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허저조식과 그 무리들을 사로잡아 [업군]으로 되돌아왔다. 


조비(曹丕)

조비가 조식 무리들의 목을 베자, 어머니 변씨가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조식을 죽이지 말도록 간곡히 청했다. 조비는 글재주가 뛰어난 조식에게 글을 짓게 해, 잘 짓지 못하면 죽여 버리고 잘 짓는다면 귀양을 보내기로 했다. 


조비가 수묵화를 가리키며 시를 짓게 하자 조식은 거침없이 훌륭한 시 한편을 지어냈다. 하지만 조비는 다시 조식에게 “형제”를 시제로 하되 형과 아우란 글자를 쓰지 않고 시를 지으라고 명했다. 조식은 망설임 없이 형 조비와 자신의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절묘한 시 한수를 읊었다. 


조식(曹植)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형제의 정을 되살려 조식의 벼슬을 안향후로 낮추어 임지로 보냈다. 왕위에 오른 조비는 법령을 고쳐 자신의 위세를 드높였는데, 한제(漢帝)를 핍박함은 그 아비 조조 때보다 더 심하였다.     


☐  ()황제에 오른 조비               


한중왕 유비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가 천자를 핍박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또한 손권조조의 신하임을 자청해 벼슬까지 받았음을 알고, 크게 노해 [동오]를 치고자 했다. 이때 요하가 엎드려 울며 유봉과 맹달이 원군을 거절해 관우가 죽게 된 것이니 그들의 죄부터 물어야 한다고 읍소했다. 


유봉(劉封) / 맹달(孟達)

유비가 그들을 잡아오도록 명하자 공명이 나서며 말렸다. 유비는 두 사람이 위에 투항하지 않도록 벼슬을 올려주고 서로 떼어 놓은 뒤 사로잡도록 일렀다. 때마침 팽양이 이 사실을 맹달에게 전하려다 마초에게 잡혀 목이 달아났다. 


팽양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맹달이 불길한 예감에 당황하고 있을 때 유봉은 면죽(西川)으로 떠나라는 한중왕의 영을 받고 맹달과 헤어졌다. 맹달은 급히 신의 신탐 형제를 불러 앞날을 의논한 후, [상용] 땅을 버리고 자신은 40여 군사만을 거느리고 위(魏)에 투항해 버렸다. 


신의(申儀) / 신탐(申耽)

유비가 유봉에게 맹달을 사로잡도록 명하자, 조비도 맹달로 하여금 유봉의 목을 베어 오도록 했다. [양양]으로 향한 맹달은 유봉을 맞아 칼을 맞부딪치다가 이내 달아나며 유봉을 유인했다. 


유인책에 말려든 유봉은 하후상과 서황의 군사에 쫓겨 [상용]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이미 배신한 신탐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자, 유봉은 다시 [방릉]으로 말을 달렸다. 



[방릉] 역시 위의 깃발이 꽂인 채 신의가 장악하고 있었다. 유봉은 간신히 [성도]에 이르러 엎드려 울며, 유비에게 그간의 일들을 전했다. 


유비유봉과 부자의 연을 맺고 있었으나,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양아들을 용서하지 않고 유봉의 목을 베게 했다. 이 일로 유비는 마음이 아픈데다 관우를 잃은 슬픔으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 그 무렵, 위왕 조비는 하후돈의 부고(訃告)를 받았다. 


하후돈(夏侯惇)

그해 정월이후 아버지 조조와 아우 조웅 및 하후돈의 장례가 이어지더니, 8월에 되면서 봉황새와 기린 등이 출현했다. 이런 상서로운 조짐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위(魏)가 한(漢)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공론이 일었다. 


뜻이 모아지자 문무관원들은 헌제를 찾아가 양위를 주청했다. 헌제는 고조 이후 4백년을 이어온 대업을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하자, 여러 백관들이 나서 드러내놓고 황제를 핍박했다. 


後漢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

다음 날, 조홍과 조휴가 칼을 차고 들어와 헌제에게 내전으로 나갈 것을 재촉하자, 조황후는 오라버니가 역적질을 한다며 통곡했다. 헌제가 대전으로 나오자 화흠은 제위를 조비에게 넘기라며 엄포를 놓았다. 


결국 화흠 등은 황제에게 강제로 조서를 쓰게 하여 옥새와 함께 조비에게 바치게 했다. 민심을 의식한 조비는 겸양을 보이고자 두 번에 양위를 거절한 후, 헌제로 하여금 직접 조비에게 옥새를 바치게 하고 천하를 선양토록 했다. 이로써 한(漢)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조황후(曹皇后) / 화흠(華歆)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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