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재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Mar 25. 2019

간략 삼국지(37)

목우유마(木牛流馬)


☐  서촉으로 군사를 낸 사마의     


건흥 8년(230년) 7월, 병이 다 나은 조진은 [한중]을 치겠다며 위주에게 표문을 올렸다. 이때 [형주]를 살피고온 사마의가 [동오]의 출병조짐이 없다고 전하자, 조예는 조진과 사마의로 하여금 40만 대군을 이끌게 하고 조진은 [야곡도], 장합은 [자오도], 사마사는 [기산로]를 통해 한중(漢中)을 치도록 했다. 



그때 공명은 건강을 회복해 장졸들에게 팔진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위(魏)의 소식을 들은 공명은 왕평과 장의에게 각기 1천기를 이끌고 진창(기곡도)으로 가서 적을 막도록 했다. 


왕평과 장의가 공명의 의도를 몰라 머뭇거리자, 천문을 살펴왔던 공명은 필시 큰비가 쏟아질 것인즉 40만 대군이 좁고 험한 [진창]을 들어서기가 쉽지 않기에, 적은 군사로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음을 알렸다. 


조진 출사(曹眞 出師)

공명은 [한중]으로 나아가 장마철을 지낼 양초(糧草)를 마련한 뒤, 적이 지칠 때를 기다려 치고자 했다. 공명의 말대로 심각한 호우가 30일간 끊임없이 이어지니, [진령산맥] 좁은 계곡들을 대부분 통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 달 반 동안 진격이 지지부진해지자 위의 대군은 양초가 바닥나고, 후진과 연락도 끊겨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조진과 사마의가 공격을 포기하고 철군에 나서자 공명은 적군을 뒤쫓지 않고, 오히려 방비가 소홀해진 [기산]을 공격하고자 했다. 


촉(蜀) 장수 왕평(王平) / 장의(張嶷)

한편 조진은 촉군이 추격해오지 않자 자신들이 철수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여긴 반면, 사마의공명이 자신들을 멀리가게 놓아둔 뒤 [기산]을 점령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조진사마의의 주장대로 군사를 둘로 나눠 [기곡]과 [야곡]의 골짜기입구를 열흘 동안만 지키기로 했다. 


그사이 [기곡]으로 향하던 위연에게 등지가 달려와 매복에 주의하라는 공명의 당부를 전하자, 위연과 진식은 공명이 지나치게 의심이 많다고 빈정대며 [기곡도] 골짜기로 향했다. 


촉(蜀) 장수 위연(魏延)

이를 전해들은 공명은 지난날 유비가 생전에 위연이 용맹하나 반역할 상(相)이니 뒷날 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라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선봉에 선 진식은 기세 좋게 [기곡]으로 달려 나가다 위의 복병에게 4천여 군사를 잃고 말았다. 


한편 여드레가 되던 날, [야곡]의 길목을 지키던 조진은 촉의 군사들이 나타나자 방비를 소홀히 했던 탓에 크게 패하며 달아나다, 사마의가 군사를 이끌고 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진식(陳式: 삼국지 저자 진수 아비) 

공명에게 패한 분함과 부끄러움으로 다시 자리에 누운 조진은 병이 점점 깊어만 갔다. [기산]에 영채를 세운 공명은 군령을 어긴 진식을 불러 목을 베었다. 하지만 위연은 큰 싸움을 앞두고 그의 용맹이 아쉬운 터였기에 살려두었다. 


공명은 위에서 투항한 병사들을 돌려보내며 조진에게 글 한통을 전하게 했다. 조진은 자신을 비웃고 꾸짖는 공명의 글을 보고 울화가 가슴에 치밀어 올라 마침내 그날 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위(魏) 장수 조진(曹眞)

조진의 죽음소식을 전해들은 조예는 몹시 노하여 즉시 촉(蜀)을 치도록 명하자, 사마의는 공명에게 전서(戰書)를 보내 싸움을 청했다. 이에 공명은 사마의에게 진법을 펼쳐 자웅을 겨루자고 했다. 


사마의가 먼저 깃발을 좌우로 흔들어 진세를 펼치자, 공명은 그것이 혼원일기진(混元一氣陣)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어 공명이 깃털 부채를 흔들어 팔괘진(八卦陣)을 펼치며 자신의 진을 깨뜨려보라고 하자, 사마의는 화가 치밀어 세 장수를 출정시켜 진 안으로 들여보냈다. 


제갈공명(諸葛孔明)

하지만 진이 마치 성과 같이 이어져 있을 뿐 문이 없어 도무지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가운데, 촉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공명이 위병을 돌려보내자 화가 난 사마의는 앞장서 총공격을 감행했지만, 갑자기 뒤에서 관흥이 내달아 오더니 옆쪽에서 강유가 기습해 들어왔다. 


사마의는 포위망을 뚫고 [위수] 북쪽으로 물러나 영채를 세운 뒤 일체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싸움에서 승리하고 [기산] 영채로 돌아온 공명은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게을리 한 구안에게 곤장을 때려 쫓아 보냈다. 


구안(句安)

이에 앙심을 품은 구안은 사마의에게 가서 항복해버렸다. 사마의는 구안으로 하여금 [성도]로 돌아가 공명이 머지않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한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게 했다. 구안이 환관들을 통해 헛소문을 알리자, 크게 놀란 황제 유선은 조서를 내려 공명을 즉시 [성도]로 불러들였다. 


유선(劉禪)

네번째로 [기산]에 나왔던 공명은 퇴각하는 영채 안에 밥 짓는 아궁이를 배로 늘려 쌓게 하여, 사마의가 경계심을 갖고 함부로 뒤쫓지 못하도록 한 후 군사를 물리도록 했다. 사마의는 촉군이 머물러 있던 곳마다 아궁이 숫자가 점점 늘어난 것을 보고 군사를 매복시킨 것으로 여겨,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공명의 계책이었음을 알고 탄식하면서 [장안]으로 돌아갔다. [성도]로 돌아 온 공명은 거짓소문을 퍼뜨린 구안을 잡아들이게 했으나, 이미 구안은 위나라로 달아난 뒤였다.


사마의(司馬懿)

☐  공명의 오출기산(五出祁山) 


공명은 환관들의 목을 베고 대신들을 불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당부한 뒤, [한중]으로 돌아가 건흥 9년(231년) 봄에 다시 [위]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오출기산(五出祁山)

이에 위주(魏主) 조예사마의로 하여금 진병케 했다. [장안]으로 달려간 사마의는 장합에게 선봉을 맡기고 곽회로 하여금 [농서]의 여러 고을을 지키게 했다. 


사마의는 공명이 [농서]의 보리를 베어 군량을 조달하려는 것을 꿰뚫어보고 촉병이 보리 베어가는 것을 막도록 했다. 그때 공명은 항복해 온 [노성]을 차지한 후, 보리를 수확하기 위해 [농상]으로 향했으나, 이미 [농상]에는 위(魏)의 군마가 가득 차 있었다. 


위(魏) 장수 곽회(郭淮)

이에 공명은 옷을 갈아입은 뒤 자신의 사륜거와 똑같은 수레 세 대를 끌어오게 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고 맨발에 머리를 풀어헤친 괴이한 모습의 군사들로 하여금 각 사륜거를 밀도록 하고, 강유마대위연에게 수레 한 대씩을 이끌고 나가게 했다. 


이어 공명도 군사를 거느려 보리를 벨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었다. 사마의공명이 탄 수레를 이끄는 군사들의 괴이한 모습을 보고 즉시 잡아들이도록 했다. 그러나 급히 수레를 뒤쫓아도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제갈량 4, 5차 북벌 진로

공명이 축지법을 쓴다고 생각한 사마의가 군사를 돌이키려 하자, 사방에서 방금 전과 똑같은 모양의 수레에 올라 탄 공명이 나타났다. 괴이쩍은 군사들과 신출귀몰한 공명의 모습에 사마의와 위의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상규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들을 풀어 [농상]의 보리를 모두 베어 [노성]으로 실어가게 했다. 이때 사로잡힌 촉병으로부터 공명의 계책에 속아 넘어간 것을 알게 된 사마의는 곽회와 함께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노성]으로 향했다. 


5차 북벌 노성전투

하지만 공명은 성(城) 동남과 서북쪽 보리밭 속에 강유위연마대마충 네 장수를 매복시켜 두고 있었다. 해질 무렵 [노성] 아래 당도한 사마의는 밤을 기다려 북을 울리며 [노성]을 에워쌌다. 


때마침 사방 보리밭에서 촉병이 달려들며 성 안의 촉병들도 성 밖으로 밀려나오자, 사마의는 크게 패하며 산마루로 달아나고 말았다. 사마의는 지원군을 이끌고 온 손례로 하여금 촉군의 군량보급로를 끊도록 [검각]으로 밀고 들어가게 했다. 


그때 공명은 강유와 마대에게 군사를 주어 [검각]으로 나아가 그곳의 험한 길목을 지키도록 했다. 또한 공명은 성 밖에서 군사들을 매복시킨 후 [노성] 가까이에 영채를 세운 손례의 구원병들을 짓쳐들어 크게 물리쳤다. 


위(魏) 장수 손례(孫禮)

그런데 영안성(파서 동부)의 이엄으로부터 뜻밖의 전갈이 날아왔다. 소문에 의하면 [동오]가 [낙양]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며, 이에 [동오]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이엄의 보고에 공명은 군사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명이 군사를 서천(서촉)으로 물러나게 하자, 사마의는 지난날 공명을 뒤쫓다 낭패를 당한 기억 때문에 선 듯 군사를 내려하지 않았다. [기산]의 군사들을 다 물리고 난 공명은 마충을 [검각]에 매복시키고, 위연과 관흥에게 적의 뒤를 치도록 했다. 


촉(蜀) 장수 마충(馬忠) / 관흥(關興)

공명이 [노성]의 군사를 물린 것을 확인한 사마의는 장합에게 뒤를 쫓게 했다. 하지만 장합은 번갈아 덤벼드는 위연관흥을 쫓아 온종일 산속을 헤매다가 매복군이 쏜 화살을 온몸에 맞아 죽고 말았다. 장합을 잃고 난 사마의는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갔다. 


위(魏) 장수 장합(張合)

그 무렵 [성도]롤 돌아 온 공명이 알아보니, 이엄이 군량을 기한 내 마련하지 못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엉뚱한 거짓 글을 보내 자신의 죄를 면해보려 했던 것이었다. 


크게 노한 공명이엄의 목을 베는 대신 벼슬을 빼앗고 귀향을 보냈다. 공명은 다섯 번째로 [기산]으로 나아갔으나, 안타깝게도 이엄으로 인해 또다시 천하평정의 큰 꿈이 꺾이고 말았다.


촉(蜀) 장수 이엄(李嚴)

☐  제갈량의 목우유마(木牛流馬


중원(中原) 평정의 큰 꿈을 버리지 못한 공명은 3년에 걸쳐 양초를 비축하고 군사를 조련해 건흥 12년(234년) 봄, 다시 위(魏)를 정벌하고자 했다. 


[한중]에 도착한 공명은 관흥이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의 죽음을 애달파했으나, 오래지않아 공명은 위연과 강유를 선봉으로 삼아 34만 대군을 이끌고 군사를 다섯 길로 나누어 여섯 번째 기산(祁山)으로 향했다. 


이에 사마의는 하후연의 네 아들을 거느리고 40만 대군을 이끌어 위수(渭水)에 영채를 세운 뒤, 그곳에 부교를 세우게 했다. 이어 하후패와 하후위에게는 부교를 건너 영채를 세우게 한 후, 곽회로 하여금 [북원]에 영채를 세우고 방비에 전념토록 했다. 


위(魏) 장수 하후패(夏候覇) / 하후위(夏侯威)

그 무렵, [기산]에 이르른 공명은 [북원]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위수] 남쪽을 빼앗으려했다. 하지만 촉(蜀)의 동태를 살피던 사마의공명의 계책을 간파하고, 하후패로 하여금 [위수] 남쪽 산속에 매복토록 했다. 


또한 부교 언덕에 궁노수들을 매복시킨 후, 촉병이 뗏목을 타고 내려올 때 활과 쇠뇌를 쏘도록 했다. 그때 공명도 위연과 마대에게 [북원]을 치게 하고, 오반에게는 뗏목에 군사를 태우고 가서 부교를 불태우게 했다. 


제갈량 6차 북벌 진로

또한 왕평 등을 주력군을 삼아 [위수]의 영채를 치게 했다. [북원]으로 향한 위연마대사마의와 곽회의 매복군사에 휘몰리며 패한 후 오반의 뗏목에 함께 올라 부교를 불태우려 했으나, 궁노수들의 화살에 크게 패하며 오반도 죽고 말았다. 


왕평도 위병을 맞아 한바탕 혼전을 벌였으나 많은 군사가 꺾이고 말았다. 사마의의 계략에 패한 공명은 [동오]에 비위를 보내 위(魏)를 공격해줄 것을 청했다.


촉(蜀)  오반(吳班) / 비의(費禕)

30만 대군을 일으켜 위(魏)를 치겠다는 손권의 뜻을 전해들은 공명은 때마침 위의 장수 정문이 거짓항복을 해오자, 그를 거꾸로 이용해 사마의를 끌어내기 위한 거짓 편지를 쓰게 했다. 


위군이 촉의 영채로 밀고 들어오면 자신이 안에서 호응하겠다는 정문의 편지를 그대로 믿은 사마의는 밤을 틈타 촉의 영채를 공격했다. 그러나 캄캄한 밤중에 숨어 있던 촉병에게 기습을 당한 위병들은 싸우기도 전에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촉병의 화살을 피해 목숨을 건진 사마의는 살아남은 군사들만을 이끌고 본채로 돌아갔다. 공명은 정문의 목을 벤 후, 군사를 풀어 싸움을 돋우었지만 사마의는 응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한 공명은 [위수]의 동서쪽 지형을 살피다가 표주박 모양의 골짜기인 [호로곡]을 발견하고는 한 가지 계책을 떠올렸다. 이어 공명은 목공기술에 능한 군사들을 뽑아 [호로곡]으로 들어가게 하여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만들게 했다. 


목우유마는 소와 말을 본떠 공명이 발명한 나무 수레로, 군량과 무기를 나르기 위한 것이었다. [검각]에 있는 촉군의 양초를 [기산]으로 옮겨오는데, 목우유마로 인해 소와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도 군량을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다. 


며칠 뒤 목우와 유마가 만들어지자 좁고 험한 [검각]과 [야곡] 땅에서도 군량을 나르는 일의 걱정을 덜게 되었다. 그 무렵, 촉군의 군량과 마초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사마의는 목우유마의 소문에 크게 놀랐다. 이에 사마의는 촉군의 목우와 유마 몇 개를 빼앗도록 한 뒤 그것을 본 떠 2천여 개의 목우유마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공명은 위병이 목우유마를 빼앗아 갈 것을 짐작해 그 대비를 해두고 있었다. 며칠 후 위병이 목우유마를 이끌고 군량을 나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공명은 왕평을 보내 양초를 운반하는 위병들의 목우유마를 빼앗아 오도록 했다.


또한 [북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위병이 뒤쫓으면 목우유마 혀를 비틀어 놓고 달아나도록 했다. 위병을 물리친 왕평이 목우유마를 이끌자, 곽회가 군사를 수습해 뒤쫓아 왔다. 목우유마를 되찾은 곽회는 목우와 유마를 끌고 가려했지만, 혀가 뒤틀린 목우유마는 꿈쩍하질 않았다.



위병들이 당황해할 때쯤, 위연과 강유가 왕평과 함께 맹공을 퍼부어댔다. 곽회가 놀라 달아나자, 왕평은 목우유마의 혀를 반대로 비틀어 바람같이 몰고 갔다. 


이를 본 곽회가 다시 군사를 되돌려 왕평을 뒤쫓자, 홀연 산 뒤쪽에서 귀신같이 괴이하게 꾸민 한 떼의 신병(神兵)들이 쏟아져 나와 목우유마를 호위하며 달아났다. 이를 지켜본 곽회와 위병들은 놀랍고 두려워 감히 그 뒤를 쫓지 못했다.


괴이한 신병(神兵)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
매거진의 이전글 간략 삼국지(3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