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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04. 2015

조선왕릉 탐방

(05) 단종비 유적지  Storytelling   


종로구 숭인동에는 궁궐에서 쫓겨난 단종비 정순 왕후 송씨가 여생을 보냈던 곳인 정업원(淨業院) 터가 있으며, 또한 단종이 유배된 후 날마다 뒷산에 올라 단종이 머물던 영월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는 동망봉(東望峰)이 있다고 한다. 단종에 대한 애틋한 사연을 좀 더 자세히 확인해보고자 숭인동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제일 먼저 숭인동 언덕길에 위치한 청룡사 바로 옆에 "정업원 터"를 들러 보았다.


단종비가 여생을 보낸 정업원(淨業院) 터

1771년(영조47) 영조가 잠시 창덕궁에 나왔다가 단종비의 애달픈 사연을 전해 듣고는 직접 절까지 행차하여, 그곳이 "옛날 정순왕후가 머물던 터"라 하여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각과 친필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비각현판에는 "뒷녘 바위산 앞에 솟은 동망봉이여 영원하라"는 "전봉후암어 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 친필을 남기고, 또한 절 뒤 봉우리에는 동망봉(東望峰)이란 친필 표석 을 세웠다.


영조 친필인 "前峯後巖於千萬年"  비각 현판

이때부터 이곳의 절(청룡사) 이름을 정업원이라 불렀다 한다. 이곳은 당초 922년(태조5) 고려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한 비구니 사찰이며 고려건국을 예언했던 도선대사가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르기 위해 지어진 절이었다 전한다.  


영도교를 지나 영월로 귀양가는 단종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정업원은 원래 궁 안 동북쪽에 있던 법당이었으나, 숭유억불을 따르던 유학자들에 혁파대상 이었기에 유생들의 반발로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로 정업원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업원은 일찍이 군왕과 사별하거나 자식이 없이 궁을 나오게 된 후궁 등 이러저러한 쓸쓸한 사연을 간직한 조선왕실의 여인들이 비구니가 되어 불가 에 의지하면서 여생을 보낸 곳이었다.  정업원은 세종 때 혁파되었다가 불자였던 세조에 의해 복원 됐으며, 연산군 때 다시 혁파되고 명종 때 후궁들에 별처로 삼는다는 명목으로 명종 모후인 문정왕후 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영도교에서 정순왕후 이별행차 공연

선조는 몇 차례의 혁파건의를 물리치고 존속 시켰으나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김개시가 인조 반정 소식을 듣고 민가에 숨었다가 반정군에 잡혀 참수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궁궐 내 정업원은 폐쇄 된 것으로 보인다.


정업원 터가 있는 비구니 사찰인 청룡사  

숭인동 사찰인 정업원은 순조 조에 화재로 소실돼 중수했고 1823년(순조23) 순원왕후의 병세가 깊어지자 부원군 김조순이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 이후 왕비의 병이 낫자 김조순은 절에 보답코자 사찰명칭을 청룡사로 바꾸었다 한다.


단종과 송씨와 마지막 밤을 보 냈다는 우화루

일설에 의하면 청룡사 안의 우화루(雨花樓)는 귀양길에 나선 단종과 송씨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곳이라고 하는데 "꽃이 비처럼 흩날리듯 쏟아졌다" 는 뜻의 우화루는 단종과 송씨가 영원히 이별한 장소라는 의미로 영리정(永離亭)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영조의 친필표석 자리에 세워진 동망봉 표석

청룡사 담장에서 바라보이는 동망봉(東望峰)은 우측언덕을 따라 낙산길 우측으로 15여분 오르면 나타나는데, 실제의 동망봉은 일제강점기에 헬기장으로 사용하려했던 일본인들에 의해 봉우리가 깎여나갔으며, 이곳 돌산을 채석장으로 사용하여  일부 산이 깎여 나감으로써 지금은 영조 친필의 동망봉 표석을 찾아볼 수 없다.


영월을 바라보고 있는 팔각정자 동망정(東望亭)

동망봉 남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능선은 모두 근린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공원 동쪽에는 새롭게 세워진 팔각정자 동망정(東望亭)이 영월을 향해 있다.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동망봉 서편 바위는 채석장으로 깎여버린 절벽이 남아있어,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 흉물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동망봉 아래  채석장으로 깎여버린 흉물스런 절벽

정순왕후는 생계를 위해 비단에 자줏물을 들여  댕기와 저고리 깃, 옷고름 등을 만들어 내다 팔았는데, 자주염색을 했던 자주샘물이 청룡사 에서 동망봉으로 가는 길에 남아있다. 샘물 좌측 암벽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있는데, 바위 밑에 흐르던 샘물은 말라 버리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자주우물이라 불리는 샘물  암벽에 새겨진 자지동천

자지동천의 샘물을 이용해 염색을 하고 그 옆 바위 에 펼쳐 말렸다고 하는데 이후에 바위는 "자주 바위"라 하고 샘물은 "자주우물"이라 불리었으며,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주골"이라 부르고 있다.


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우물

동망봉을 내려와 약 3Km 정도 거리에 소녀 정순 왕후가 영월로 귀양 가던 열일곱 단종과 영원히 이별한 영도교(永渡橋)가 있는데, 그 근처에 있는 숭신초등학교 주변이 당시 야채를 팔던 금남(禁男)시장이었다고 친절한 여성문화유산 해설사가 귀띔해 준다.


숭인초등학교 앞 옛 禁男市場이었던 여인시장 터 표석


오랜세월 역사의 아픔을 함께 하고있는 청계천 영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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