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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0. 2015

조선왕릉 탐방

(06) 남양주 소재 왕릉군  Storytelling


왕릉탐방은 가능하면 2인 1조로 방문해야 역할 분담이 있어 다소 여유를 찾을 수 있는데 금차 아내와 방문일정을 맞출 수 없어 의정부 거주 친구에게 연락을 취한 뒤 왕릉동행을 부탁하여 간신히 남양주에 산재해있는 왕릉 네 곳을 찾아 봅니다.     


판교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구리를 조금 지나 남양주 광릉까지 60Km를 달려 사릉을 시작으로  광릉과 광해군 묘, 홍유릉까지 둘러보았습니다. 광릉수목원에서 멀지않은 진건읍 사능리에 단종 비였던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사릉(思陵)이 있습니다.



세조와의 생전에 악연을 그녀는 죽어서도 가까이에서 그 끈을 이어가나 봅니다. 그녀는 죽기 전 서인신분 이였기에 해주정씨 가문묘지에 안장됐으나, 숙종 조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이곳이 사릉으로 정해지게 됐더군요.  

    

단종이 17세에 사사됐지만, 정순왕후는 모진 목숨을 끊지 못하고 중종 조였던 1521년 82세  일기를 남겼습니다. 남편이 폐위된 뒤 무려 5대 왕조를 지켜봐야했던 고통이 서려있는 사릉을 둘러본 뒤 수목원으로 잘 알려진 광릉으로 향합니다.   


광릉 조영을 기록한 “光陵志”에 의하면 서 동구십리에 수많은 전나무, 측백나무, 잣나무를 심고, 동 동구5리에는 전나무, 잣나무, 진달래를 맞대어 심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조성된 인공 숲이 오늘에 광릉수목원을 이루고 있기에, 그 옛날 왕릉산림을 담당했던 능수호군들이 능주변을 얼마나 철저히 관리했는지 잘 알 수 있네요.



광릉(光陵)은 세조의 능이지요. 능을 들어서는 길목부터 울창한 숲길인데 세조 생전의 위세가 느껴집니다. 세조는 조부 태종의 악업을 복사해 혈육참사로 등극하면서 13년 재위 중 많은 사연을 남기기도 했지요. 광릉에는 세조와 정희왕후가 웅장한 동원이강릉을 이루어 잠들어있습니다.   

  

세조가 왕위에 머무는 동안 단종 생모인 현덕왕후(문종비)가 자주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고 꿈속 그녀가 내뱉은 침 때문에 문둥병 비슷한 피부병으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하다 불교에 귀속해 참회하다 죽었습니다. 억지권력을 세웠던 것에 불행이 잉태됨을 역사에서 깨달아봅니다.



광릉을 빠져나와 진건면 송릉리 나지막한 산도로를 따라 정상부근에 오르니 광해군 묘가 철망 울타리로 막혀있고 자물쇠를 잠가놓았더군요. 할 수 없이 차를 산길도로에 세워두고 펜스를 넘어 들어가 봅니다. 부부가 쌍묘를 이루고 있는데 폐왕에 대한 역사의 비정함이 느껴집니다.  

   

발길을 돌려 마지막 남은 남양주시내에 위치한 홍유릉을 찾아가 봅니다. 홍유릉(洪裕陵)은 고종과 순종이 잠들어있는 조선 말기에 대한제국 황제능입니다. 홍유릉은 황제능의 격식을 갖추어 능의 배열과 규모가 이전의 왕릉들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능역 앞에 조성돼 있던 수호석물들이 홍살문과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 좌우에 배치돼 있으며 수호석물도 코끼리, 낙타, 기린, 해태가 추가로 조성돼 세월에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능의 난간석에는 십이지간 글자가 새겨져 있더군요.     


조선500년 영욕의 세월이 교차하며, 일몰하는 역사의 뒤안길에 서 있었던 고종과 순종은 홍릉과 유릉에 말없이 잠들어 있습니다. 백년전 치욕스럽던 한일병합을 감내해야 했던 고종황제는 1919년 덕수궁서 승하하여 청량리 명성황후 능을 천장하여 합장했습니다.     


 이후 1926년 순종황제가 창덕궁서 승하하자, 용마산 내동(동) 순명황후 능을 천장해 합장함으로써 홍유릉이 조성되었죠. 당시 일본이 20년 앞서 패망해 1925년에 해방되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찌됐을지 억지상상을 해보며 남양주에 소재한 왕릉군 탐방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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