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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y 11. 2019

이탈리아 기행(01)

로마의 역사


☐  로마역사 요약      


로마제국은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 그리고 지중해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페르시아 및  이집트까지 지배했던 고대 최대의 제국이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周나라/古朝鮮) 무렵부터 시작됐는데, 그리스에서 지중해를 건너 이주해간 한 집단이 테베레(Tevere) 강에 정착하며 역사가 시작된다. 



로마 고대설화에 의하면 테베레 강가에 두 아이(Romulus & Remus)가 버려졌는데 이 형제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전해진다.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알바롱가(Alba Longa) 왕의 딸 실비아(R. Silvia)가 군신(軍神)인 마르스(▶그리스신화 Ares)와 정을 통해 낳은 자식이었다. 



두 형제의 다툼으로 로물루스(Romulus)는 아우를 죽인 뒤 3천명을 이끌고 로마라는 작은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Roma]의 명칭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BC 753년 로마건국 초대 왕에 오른 로물루스는 당시 최고 의결기구인 원로원을 창설했다.


이후 로마는 왕정기(王政期)를 거치며, BC 509년까지 7명의 왕이 로마의 국가기초를 다지며 통치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왕의 독재적 1인 지배를 견제하기 위해 공화정을 열게 되었다. 



공화정은 그리스적 민주주의 도시국가에서 따온 운영제도였는데, BC 510년부터 시작된 공화정기(共和政期)는 로마가 거대한 대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역사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BC 272년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로 눈을 돌려 이탈리아 반도 옆에 있는 시칠리아(Sicilia) 섬을 정복하고자 했다. 


당시 지중해 일대와 시칠리아 섬은 카르타고(라틴어; 포에니)의 힘이 미치는 곳이었다. 카르타고(Carthago)는 페니키아 인이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튀니지)에 세운 도시국가로, 그리스인보다 앞서 도시국가를 세우고 해상무역을 통해 번성해 있었다. 시칠리아는 두 나라 간에 전쟁이 감지(感知)되자, 각기 로마와 카르타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BC 264년, [로마]는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하며 포에니(Punic) 전쟁이 시작되었다. BC 241년 시칠리아 섬 해전에서 승리한 로마는 [시칠리아]를 차지했다. 이에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은 BC 218년 험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향하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했지만 또다시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제3차 포에니전쟁(BC 149년)을 치룬 로마군은 지중해 연안의 이베리아 반도(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페니키아)를 지배하며 지중해의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200년 이상 걸친 전쟁을 거치며 지중해의 강대국이 된 [로마]는 일개 도시국가에서 마케도니아(발칸반도 중앙)와 그리스, 소아시아(터키), 갈리아(서유럽) 및 브리타니아(영국)까지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을 세웠다.



로마가 비대해지자 정복지를 속주(屬州)로 삼아 통솔하는 1인 권력이 커지며 권력이 군부에 집중됐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카이사르(Julius Caesar)였다. 그는 뛰어난 군사전략가로 북아프리카와 북유럽 및 소아시아를 정복하며 속주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로마 원로원을 무력화시키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Caesar)를 견제하며 갈리아(Gallia, 서유럽) 총독에서 물러나게 하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Pompeius)를 추대한 원로원에 대항해 BC 49년 로마로 진격하며,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고 루비콘(Rubicon) 강을 건넜다. 원로원을 장악한 카이사르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폼페이우스가 숨어있는 [이집트]로 달려갔다.



이집트 왕위를 두고 남동생과 다투고 있던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폼페이우스를 잡아 죽이고, 카이사르의 힘을 이용해 이집트의 권력을 차지하려 했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에 앉히고 사랑에 빠져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원로원은 군사독재 하에서 황제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던 카이사르를 없애기로 했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아들처럼 아끼던 브루투스(Brutus)를 부추겨 BC 44년 카이사르를 암살하면서 공화정을 지키려고 했다. 이후 카이사르 유언에 따라 후계자가 된 옥타비아누(Octavianus)는 로마와 서방(Gallia)을 맡았고 안토니우스(Antonius)는 경제적으로 풍부했던 이집트와 동방을 맡았다. 



하지만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사랑에 빠지자 집정관 권한의 박탈과 함께 [이집트]와의 전쟁(BC 31년)이 시작됐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아그리파(Agrippa) 장군을 앞세워 이집트 군대를 제압함으로써 로마는 다시 왕정으로 전환되며 제정기(帝政期)가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초대 황제(BC 27~AD 14)가 되었고, 로마는 제정기로 접어들며 더욱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후 로마는 5현제 시대(12~16대 황제)를 거치며 가장 평화로운 시대라고 하는 팍스로마나(Pax Romana)를 실현하였다.


[로마]는 정복지의 문화와 신(神)을 인정하는 정책으로 제국의 통합과 번영을 누렸지만, 로마에 저항하는 민족은 철저하게 응징하였다. 또한 많은 교역이 발생되며 하나로 통합된 거대 경제권을 형성하면서 도로와 항구를 발달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5대 황제(AD 54~68) 네로(Nero)는 무수한 사람을 학살하며 로마제국에 큰 오점을 남겼다. 


네로 황제

로마 전성기시대는 주변 민족들에게 고난의 시대이기도 했다. 창조적인 역사를 이뤄냈던 [로마]는 타문화의 파괴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적 [카르타고]는 작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땅에 소금을 뿌려 철저히 파괴하였다. 또한 유대인 반란에 대해서는 유대인이 예루살렘 부근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나라 없는 유랑민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불후의 명화 벤허(Ben-Hur)의 배경은 서기 26년으로, 로마 제국시대 유대인 청년의 시련을 통해 신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영화이다. 예루살렘의 제일가는 부호이자 귀족이었던 벤허는 로마제국 주둔 사령관으로 부임해 온 옛 친구 멧살라(Messala)로 부터 로마에 반역하는 유대인을 검거해줄 것을 거절했다가, 보복을 받아 노예로 팔려간다. 



어느 날 벤허는 로마 집정관을 구해주며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고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멧살라와의 전차경주에 참가해 큰 위기를 넘긴 뒤, 옛사랑 여인의 권유로 문둥병을 앓는 가족을 데리고 예수에게로 간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예수가 처형되던 날, 벤허는 채찍을 맞으면서도 예수에게 물을 가져다준다.



예수가 죽음을 맞이한 뒤 어미와 누이의 나병이 낫게 되는 기적을 목격한 유다 벤허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영화 벤허(Ben-Hur)는 당시 예수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지닌 유대인들의 저항과 반란을 우려했던 로마제국의 유대 종교와 문화에 대한 파괴과정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로마제국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37)가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하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하자, 25,000여명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코린토스(Corinth)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에 유대주재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AD 26-36)에 의해 예수가 사망(AD 30년)했다.



하지만 로마는 그밖에 타문화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로마는 고대 그리스로부터는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그리스 신화 등 타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환골탈태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되어 진다. 특히 로마제국에서 예루살렘의 유대교를 받아들여 그것을 지배체제로 만든 것은 성공적인 치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로마인은 본래 가톨릭이 갖고 있던 반(反) 유대교적인 요소를 놀랍도록 수정 보편화하여 제국지배의 절대적인 수단으로 삼았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AD 306∼337) 1세 황제 이후에 가톨릭교는 군대와 맞먹는 제정(帝政)의 중요한 무기가 되기도 했다.



고대 로마는 무력을 가진 군인들이 제위를 차지하며 황제들은 권력다툼으로 단명하게 되었고, 군부의 충성을 얻기 위해 남발된 재정은 국가를 위기로 내몰았다. 결국 게르만족이 국경을 넘어 침범해 왔고, 페르시아가 강성해지면서 소아시아 국경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로마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284년 가이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Diocletianus)가 49대 로마황제가 되면서 4분할 통치제를 실시했다. 제국이 너무 크기 때문에 1명의 황제가 통치하기에 너무 크고 복잡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지며 마침내 395년 로마제국은 동, 서로 분열되었다.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했던 서로마 제국은 476년(▶고구려 장수왕)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78대 황제) 때 멸망하고, 소아시아 지역(Turkey)을 지배했던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11세기부터 계속된 이민족의 침입으로 영토가 크게 줄기 시작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이 점령한 1203년까지 번영했다. 십자군은 13세기부터 이곳을 수도로 하여 라틴제국을 건설했으나, 끝내 세력을 떨치지 못하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과 14세기 유럽에 번진 흑사병으로 국력은 더욱 약화되고, 결국 15세기 중엽에 [오스만 제국]에게 망하고 말았다. 



비잔티움(Byzantium)은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시대에 불렸던 명칭으로, 서기 325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1세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불리었다. 하지만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Mehmed)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켰다. (▶1492년;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콘스탄티노플]은 투르크식인 이스탄불(Istanbul)로 명칭이 바뀌며 이후 470년간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는 동유럽과 발칸반도의 슬라브족에게까지 이어짐으로서, 로마가 이룩했던 지중해 지역의 통일은 세계사상 불멸에 의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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