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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Jun 11. 2020

북악산 성곽길


 北岳山 성곽길


6월 주말 40년 지우(知友)들과 북악산 한양산성을 둘러보았다. 북악산(342m)은 서쪽 인왕산(338m)과 동쪽의 낙산(125m) 그리고 남산(262m)과 더불어 옛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이들 산 능선을 연결해 그 옛날 한성(漢城)이 축조되었다.



단거리 코스인 [삼청공원]에서 출발해 20여 분을 오르면 이내 성곽이 나타난다. 서쪽 창의문(彰義門)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오르니, 성 밖으로 성북동 고급 주택들과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말바위 안내소에서 출입증을 받아 나와 조금을 걷다보면, 조선 사대문(四大門)의 하나인 숙정문이 나온다. 사대문은 1396년(태조5) 한양의 도성 사방에 세운 성문으로 숙정문은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 또는 북문으로 불리었다.


숙정문(肅靖門)

숙정문은 1413년(태종13) 풍수지리 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려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으나, 이후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가뭄이 들 때면 기우(祈雨)를 위해 성문을 열어놓고 비가 많이 오면 닫았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문이지만 사람출입이 거의 없는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의 역할은 없었으며, 항상 닫혀있었기 때문에 숙정문 대신에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하였다. 현재 서울성곽에 포함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양성곽의 정문인 숭례문(崇禮門)은 남대문이라 불리며, 서울의 성곽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었기에 국보1호로 지정됐으나 안타깝게도 2008년 2월 방화로 소실돼 5년 공사를 거쳐 2013년 복원된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함락됐던 흥인지문(興仁之門)은 1869년(고종 6)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물1호로 지정돼 있지만, 안타깝게도 조선총독부가 당시 조선을 정벌한 일본역사에 의미 있는 상징물로 여겨 1934년 보물1호로 지정했다고 한다.


서쪽의 돈의문(敦義門)은 1413년(태종 13) 숙정문과 함께 폐쇄됐다가 세종 때 남쪽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했는데, 1915년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을 핑계로 철거해 버렸다.



사대문의 명칭은 유학(儒學)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따왔으며 동서남북에 따라서 “흥지문, 돈문, 숭문, 숙정문”으로 칭하였다.


당초 북문은 소()으로 추천됐으나 한성 북향이 음기(陰氣)를 품고 있어 그 기를 꺾고자 지()를 대신해 청(淸)을 넣어 숙청문(肅淸門)이라 했다. 하지만 1523년(중종18)에는 “편안할()을 넣은 숙정문(肅靖門)이라 기록됐으며 1976년 복원되었다.

 


또한 한양의 중심에 서 있던 종각에 1895년(고종32) (普信閣) 현판이 걸리면서 마지막 신(信)을 이루게 되었다. 사대문의 이름이 모두 석자인데 반해, 흥인지문만 넉자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상 한양 동쪽 지기(地氣)가 약해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해 넉자로 지었다 한다.


보신각(普信閣)

또한 음양오행을 따라 흥인지문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 봄을 상징하는 까닭에 생명이 움트는 목(木)의 계절을 어질 인(仁)으로 여겼다. 해가 지는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니 서리 내리는 금(金)을 상징했다.


금은 의리(義理)를 뜻하여 서대문을 돈의문으로 칭했고 남쪽은 여름이니 화(火)를 의미하는 바, 화는 사물을 밝게 비추고 투명해 예의가 바름으로 숭례문이라 하였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북쪽은 겨울이요 수(水)를 가리키니, 물은 고요하므로 지(智)를 뜻한다 하여 숙정문(肅靖門)이라 칭하였다. 숙정은 "엄숙하고 고요하다"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지혜로움을 의미하는 지(智)가 들어가면 백성들이 지혜로워지고, 그리되면 양반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지혜 지(智)'자를 넣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숭례문(崇禮門)

옛 부터 향방에 따라 통상 사대문을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으로 칭했지만 북대문은 북문으로 칭했는데, 그 까닭은 북쪽은 원래 귀신이 다니는 문이기 때문에 대(大)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가뭄이 심하면 먼저 종묘사직(宗廟社稷)과 명산대천(名山大川)에 기우제를 지내고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으며 홍수 때에는 숙정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게 하여 북의 음(陰)과 남의 양(陽)을 조절하는 음양과 오행을 따랐다.


성곽을 따라 백악마루에 이르니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곧게 뻗은 광경이 장관을 이루며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을 중심으로 한 광화문 궁 담장이 시원스레 한눈에 들어온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년 간 폐쇄돼 있다가 1864년(고종2)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의 중심이던 근정전 바로 앞에 총독부청사를 신축하고 그 남쪽인 남산에 신궁(神宮)을 배치하였다.


이후 광화문을 신궁의 남북축 선상에 맞추어 동쪽으로 5.7도 틀어 재배치하였다. 광화문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가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복원되면서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3년에 걸친 복원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완공됨으로써 비로소 광화문은 예전처럼 남산이 아닌 관악산을 바라보게 되었다. 청운대에서 바라보는 경복궁 앞에는 그 옛날 육조(六曹) 거리(세종로)가 길게 뻗어있고, 정면으로는 우람한 관악산이 펼쳐져 있다.



조선 왕실은 경복궁서 바라보이는 관악산(冠岳山)의 능선이 마치 불꽃처럼 타올라 보인다하여 관악산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경복궁 내 곳곳에 해태를 세워 그 기를 꺾었다하니, 가히 조선왕실의 풍수지리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삶속에 곳곳이 배여 있었음을 실감케 한다.


서울시는 1975년 창의문에서 숙정문에 이르는 2.5Km 성곽 복원을 시작으로 꾸준히 복원해오며 2011년 말 18Km 중 12Km를 원형 복원하고 2014년 최종복원을 완료한다고 하니 하루빨리 세계유일의 성곽도시가 재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 壬辰年 유월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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