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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05. 2021

동유럽 여행기(01)

체코/ 폴란드


2006년 6월 2일(금) 징검다리 공휴일인 현충일을 끼고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아내와 함께 8박9일 동유럽으로 향했다. 동유럽 [5개국]을 돌아보는 일정은 버스로 대륙을 장시간 이동해야하기에 여독이 쌓일 수밖에 없는 피곤한 여정이다.



동유럽 여행의 관문은 대한항공과 연계된 프라하(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을 이용하기에 체코가 첫 방문국인 셈이다. 프라하까지 11시간을 날아가 공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체코 브르노로 2시간 을 이동해 100년이 넘었다는 미슬리브나(Myslivna) 호텔에서 첫날 하루를 묵었다.


Myslivna Hotel

체코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브르노(Brno)는 동부지방 중심도시로 오스트리아 (Vienna)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이다.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둘러본 호텔주변은 울창한 숲의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져 화려한 시내호텔보다 오히려 동유럽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는 곳이었다.   


폴란드(Poland)


여행 첫날 브르노를 빠져나와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둘러보기 위해 264㎞, 3시간을 달려간다. 폴란드는 “슬라브족”에 속하는 단일민족으로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인구의 90%가 가톨릭교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점령 하에 폴란드인 1/5에 해당하는 600만 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그중 유대인이 약 300만 명으로 당시 폴란드에 거주하던 유대인 대부분이 학살을 당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전후(戰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최고의 자연인구 증가율을 기록했다고 한다.


영토는 대한민국(99,900㎢)의 3.2배이며 인구는 약 3,800만 명으로, 지금의 수도는 바르샤바이다. 폴란드 역사는 오랜 과거에 몽고와 스웨덴으로부터, 근세에는 독일과 러시아 등 외세로 부터 많은 침략에 수난을 받아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폴란드인 중에는 공산국가 최초 민선대통령을 지낸 자유노조 창시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레흐 바웬사”와 최초 비(非)이탈리아 출신의 교황인 “요한 바오로2세”가 있고,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퀴리부인”이 있다.


그리고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의 아름다운 선율이 느껴지는 곳이 폴란드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 중 [바르샤바]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당시 돌아본 폴란드는 동유럽의 여러 나라 중 다소 낙후돼 있는 느낌이었다.


드넓은 폴란드 초원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폴란드는 땅에 열이 많아 겨울에도 잔디가 죽지 않고 파란색을 유지한다고 한다. 또한 풍부한 미네랄 성분과 강한 열을 지닌 흙으로 감자재배가 최적격이며, 이로 인해 폴란드 감자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가격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이런 감자를 먹고 자란 돼지고기 또한 질과 맛이 우수하다고 자랑한다. 또한 감자가 많다보니 이를 주성분으로 한 보드카가 있는데 폴란드가 원조라고 한다. 러시아 보드카는 구소련이 폴란드를 지배했을 때 폴란드 보드카를 소련제품으로 상품화했다고 한다. 2006년 당시 특산품 [쇼팽 보드카] 1병은 35유로였다.


쇼팽 보트카

  아우슈비츠(Auschwitz)  


6월 3일 폴란드에서 제일먼저 찾은 곳은 “쉰들러리스트” 촬영지였던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였다.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에 위치해 있는 이곳에는 인류를 향한 야만의 극치이자 인간이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곳은 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침(Oswiecim)이라 부르며 독일의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작은 공업도시였다.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유월초 아침 하늘은 회색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곳을 관람하는 동안 침통한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잠시 비가 내려주는 것도 좋을 듯 하다던 가이드의 바람대로 오후 2시경 버스에서 내려 수용소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용소 정문에는 녹슬은 철제간판 문구가 바람에 흔들리며 을씨년스럽게 걸려있는데, 정문간판을 적시는 빗물방울이 마치 이곳에서 죽어나간 수백만의 영혼들이 흘리는 눈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철제(鐵製) 간판에는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Albeit Macht Frei 문구가 새겨져있는데,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나 일해야 되고, 지쳐보여도 안되며 아파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 한다.



입구부터 느껴지는 분위기에서 당시 이곳으로 끌려왔던 어린아이와 부녀자, 노인들이 여기서 어떻게 처신했을지 생각해보니 몸서리처질 일이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수용소와 취사장, 감시초소 건물들이 있고, 당시 참혹했던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져 걸려있다.



입구에 있는 붉은 벽돌건물을 지나면 널따란 길이 멀리 펼쳐져있고 그 양옆으로는 철길이 양쪽으로 길게 뻗어있다. 철길 옆으로는 살벌한 전기철조망이 늘어져있고 일정간격의 감시초소가 살벌했을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감시초소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수용소는 1940년 만들어졌고 대부분 폴란드 정치범과 유대인들이 수용됐었다.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본격적인 대량학살이 자행됐고 유태인이란 이유만으로 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한다.



열차로 실려 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는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50만 명으로 추산된다는데 2/3가 유대인이라 한다.


시체 소각장

반세기전 나치에 의해 끌려온 유대인들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당시 잔혹성을 고발한 영화 『피아노』에서 보았듯이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팔목에 다윗의 별을 달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겉으로 보기에 평화로워 보였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음산함을 느끼게 된다. 수용소내부 분위기로 보아 구태여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당시 비참하고 끔찍했던 생존자들의 모습을 짐작하게 다.  



나치에 의해 가스실에서 처참히 울부짖다 목숨을 잃었을 [유대인]들과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와 [고문실] 등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되새겨본다.



[바르케나우 제2수용소]는 제1수용소에서 3㎞ 떨어져 있으며 10배 이상 규모가 크지만 1945년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제2수용소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했다 한다.


하지만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함으로써 제2수용소의 건물과 막사 일부만 남아있게 되었다. 두어 시간 둘러본 수용소는 50만평 넓은 들판에 철조망으로 굳게 둘러쳐진 수용소 외양(外樣)이 마냥 쓸쓸해 보였다.



[아우츠비츠 수용소]를 둘러보며 세기(世紀)의 폭력 앞에 절대복종으로 무기력해야만 했던 포로들을 생각할 때 평화와 자유 그리고 개개인에 인권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지난 20세기 불행했던 역사를 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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