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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09. 2021

동유럽 여행기(05)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Austria) 동부


동유럽 닷샛날,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떠나 비엔나를 향해 3시간 넘게 300㎞를 달려갔다.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맥 지역은 국토의 2/3를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지형으로 유럽에서 가장 산이 많은 나라로 3,000m가 넘는 큰 산들은 1년 내내 눈으로 덮여있다.  



영토는 83,870㎢(남한 99,900㎢), 800만명 인구의 99%가 독일어를 사용하며 약 85%가 가톨릭교도이다. 현재 수도인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어로 (Wien)이며, 1938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공화국이 재건됐으나, 연합점령군이 1955년까지 남아 있다가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유지할 것과 독일과 연합하지 않을 것이며 합스부르크를 되찾지 않을 것임을 약속받고 철수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음악분야에서 가장높이 인정받는 문화적 공헌을 했으며 이런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곡가로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요한슈트라우스, 하이든 등이 있다.


☐  슈타트 파크(Stadt Park)


6월 6일 [비엔나]에 도착해 점심을 마치고 가장먼저 시립공원인 슈타트 파크를 방문했다. [슈타트 파크]는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명소일 뿐만 아니라 비엔나 사람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이곳에는 황금색 옷을 입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동상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과 “봄의 소리 왈츠” 등은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곡이다.


예술의 향기가 흐르는 비엔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옛 성벽을 허문자리에 놓여 진 링(Ring) 거리를 지나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을 둘러본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광장 한가운데에는 합스부르크 共國(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여제(女帝)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의 양 옆에는 [자연사 박물관]과 [미술사 박물관]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  케른트너 거리(Kerntner Strasse)


비엔나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케른트너 거리]에는 오스트리아인들이 무엇보다도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는 성 슈테판 성당이 우뚝 솟아있다.


케른트너 거리

[오페라 하우스]에서 [성당]까지 연결되는 최대 번화가며 600m 남짓 거리의 보행자 천국으로 카페, 레스토랑, 유명 옷가게 등이 모여 있는데 한국의 명동과 비슷해 많은 인파로 활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  성 슈테판 성당(St. Stephansdom)


슈테판 성당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식 성당으로 [비엔나]의 혼으로 불리는 이 도시의 첫 번째 상징적인 건물이다.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해 고딕 양식으로 완성된 [슈테판 성당]은 모차르트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진 곳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인들이 평상시 시내를 간다고 하면 슈테판 성당 근처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한다. 성당이름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돼있는 성인 "슈테판"의 이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었다.


슈테판 성당은 137m의 첨탑과 25만개의 벽돌로 만들어진 모자이크 지붕이 특징이다. 당초 양식은 로마네스크였으나 화재로 붕괴된 이후 현재와 같은 고딕사원으로 재건축되었다.  


슈테판 성당내부

성당 안에는 아름다운 제단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도 볼만하다. 성당 지하에는 대주교 무덤과 [합스부르크 왕실]의 내장을 보관해 놓은 항아리와 당시 흑사병으로 사망했던 유골 2,000여구를 한데 모아놓은 지하묘지 카타콤베(Catacombe)가 있다고 한다.

 

☐  쇤브룬 궁전(Schönbrunn Palace)


쇤브룬 궁전

[케른트너 거리]를 빠져나와 40여분을 달려 [쇤브룬 궁전]에 도착했다.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지배했던 절대 왕정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이었던 쇤브룬 궁전은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명소로 “아름다운 샘물”을 의미한다.



특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집권 이래 최대번성기를 누렸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후 왕실의 화려함과 전통을 잘 간직해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중요 문화기념물 중 하나가 되었다.



쇤브룬 궁전은 1805년 비엔나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프랑스군의 사령부로 삼았던 곳이며 1차 대전 막바지인 1918년 11월 [합스부르크家] 오스트리아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가 퇴위 결의서에 서명한 곳이기도 하다.


쇤브룬 궁전 후원(後園)

강력한 여제(女帝)의 명령 하에 1743부터 6년에 걸쳐 건축된 이 궁전은 그녀의 절대 권력의 힘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됐으며 총 1,400여개 방(房)중 일반인에게 40개만 공개하고 있다한다.


쇤브룬 궁전 실내도

궁전중앙을 기준으로 동, 서관으로 구분되는데, 동관은 “마리아 테레지아”여왕과 그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거처하던 곳이다. 맨 처음 마주하게 되는 ①대 갤러리(Great Gallery)는 10m폭에 길이가 40m에 이르는 거대한 홀로 축하행사용 무도회장이다.  


대 갤러리

갤러리 오른쪽에는 중국식 원형밀실인 ②라운드 차이니스 캐비닛(房)이 있다. 이곳은 여왕자신이 비밀 회담을 갖던 장소로, 금가루 무늬에 옻칠을 한 벽과 중국 도자기, 화병 등으로 장식돼 있어 눈길을 끈다.


라운드 차이니스 방

이어지는 동관 ③거울의 방(Spiegel•saal)는 [여왕의 결혼식 장면]과 이곳을 방문했던 어린 [모차르트 그림]이 걸려있다. 이 방은 여섯살 난 모차르트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방으로 제일 인기 있는 곳이다.


거울의 방

서관에 있는 ④뷔에_락(Vieux_Laque; 옻칠) 방은 남편 슈테판을 사랑했던 테레지아가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꾸민 방이다. 북경에서 직접 수입한 래커(lacquer) 판들을 두나무 벽판 안에 집어넣고 황금테두리로 장식 했다. 1918년 [카를 1세] 황제가 퇴위에 서명했던 방이기도 하다.


옻칠 방

이 궁전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한 방들 중 하나인 ⑤백만(Millions)의 방은 아주 귀하고 값비싼 장미목으로 벽장식을 만든 데서 유래됐다. 황금장식을 한 방안에는 인도와 페르시아 왕족들의 궁정모습과 삶을 주제로 한 세밀화들이 있다.


백만의 방

37번으로 지정된 ⑥부자 방(Rich Bedroom)에는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 때 황금과 은을 실로 뽑아 수를 놓았다는 황금침대가 보전돼 있는데 무척이나 호화롭게 느껴진다. 황제 부부는 이 화려한 방에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을 낳았다고 한다.


부자 방 황금침대

마지막 들러본 ⑦프란츠 카를(Franz Carl) 서재가 있는데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셋째 아들로 정치적 무관심과 건강상의 이유로 장남인 “요제프”에게 황위를 양보했다 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근현대사의 걸출한 위인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길러낸 역할을 인정받고 있다.

 

프란츠 카를 서재

내부 장식과 소품보전을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유리 벽면이 설치돼 있는 쇤브룬 궁전은 부분적인 개보수를 통해 옛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궁전정면 언덕에는 글로리에테(Gloriette)가 있는데 궁전전체의 전망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이다.


글로리에테

쇤브룬 궁전을 둘러보며 몇몇 소수 왕족들을 위해 당시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힘든 삶을 살았을지 그들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중세 지구상에 왕족들은 호화스러운 궁전을 짓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 같아 잠시 씁쓸해지기도 했다.


 

☐  왈츠 음악회


오후관광을 끝낸 뒤 다시 비엔나로 돌라와 저녁시간 왈츠 음악회를 관람했다. 이곳에서 음악회를 보지 못하고 떠난다면 왠지 후회할 것 같았다. 음악회는 20여명으로 구성된 중소형급 오케스트라였다.


오스트리아에는 과거 귀족들이 악사들을 집으로 초대해 연주를 즐겼다 한다. 비엔나에서의 음악회공연은 이런 대저택들을 잘 보전해 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동안  음악회는 예술의 전당과 같은 매머드급 장소에서 관람하는 것으로만 알고 지내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해마다 배출되는 수많은 연주자들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이같이 중소규모 음악공연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가이드 설명이다. 당시 음악회 관람료는 옵션투어로 1인당 80유로였는데 공연규모에 비해 조금은 비싼 느낌도 들었다.


음악회는 3부로 나뉘어 한 시간 반 공연으로 이어지고, 공연의 중간쯤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 연주될 때는 신나는 리듬에 맞추어 무대와 관객이 하나가 되어 모두들 박수를 쳐가며 음악회를 즐겼다.

 

호이리게 전통음식점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세계 관람객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음악을 통해 공감대를 이루는  모습을 보며 문화예술이 갖는 각별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어둑해질 무렵, 외곽 선술집을 찾아 관광코스인 호이리게 특식을 맛보았다.



[호이리게]는 그 해에 수확한 와인을 뜻한다는데 와인과 함께 고기를 비롯한 음식들을 음악과 함께 흥겹게 즐기는 것이 오스트리아 여행만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음식은  샐러드에 이어 고기, 소시지감자,  등이 나오는데, [호이리게 식당]에는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연주가 있어 즐거움이 더해진다.



세계인이 애창하는 에델바이스 외 아리랑과 한국가요 몇 곡을 연주해주던 악사들의 모습이 꽤나 살갑게 느껴진다. 한 잔술에 얼큰해진 여객(旅客)들의 지갑이 연실 들락날락 바빠지면서, 거리에 악사들의 연주는 더욱 흥에 젖어 식욕을 돋운다.


 



 ▣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 Haus)


합스부르크家는 10세기경 소영주(小領主)에서 비롯되어 11세기 스위스에 합스부르크(매의 성) 山城을 쌓은 후 합스부르크 백작이라 불렸다. 독일에 황제가 없었던 대공위(大空位)시대 능력 있는 국왕출현을 꺼린 독일제후가 합스부르크 집안의 루돌프 1를 독일(신성로마제국) 국왕으로 선출(1273년) 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일부 주(州)와 보헤미아(체코서부)를 병합해 가문 번영에 기초를 닦았다.  이후 [합스부르크家]는 가령(家領) 확대를 추진하며 남동(南東) 독일의 대세력이 되었다. 15세기말 합스부르크家 중흥의 시조인 막시밀리안 1에스파냐 왕실과 통혼(通婚)하며 통치영역(에스파냐,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확대를 추진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에스파냐 왕을 겸했던 카를 5 때에는 지배영역이 최대 규모에 달했다. 당시 프랑스 프랑수아 1는 [합스부르크家]를 견제키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제위를 보유한 오스트리아 계에스파냐 계로 분열되었다.



하지만 독일 제위(帝位)를 보유하면서 오스트리아와 그 밖의 본령(本領) 외에 헝가리, 보헤미아(체코)를 영유(領有)했던 [오스트리아 계]의 합스부르크家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 대적(對敵)하는 동방(東方)의 거대한 세력이었다.


18세기 중반에는 강력한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가 통치자로 등극해 유럽 열강세력의 각축전에서 오스트리아를 강력한 국가로 개혁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연방국가 모델을 창출하는 왕가가 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와의 대립은 나폴레옹 시대까지 계속돼 시종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해 라인동맹(1806년)을 계기로 [신성로마제국]의 칭호를 버리고 19세기 이후로 오스트리아 황제라 칭했다.


19세기에 들어 프로이센(독일)과의 전쟁(1866년)에서 패해 독일연방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독일제국의 세력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1918년 황제 카를 1가 퇴위하며, 650년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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