罪와 罰의 殘像
얼마 전 소설 죄와 벌(2권)을 47년 만에 다시 읽어보기 위해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오랜 세월 탓에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남녀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이름뿐이고 사회정의를 위해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2022년 8월초 김훈 소설 [하얼빈]을 훑어본 뒤로 안중근 先生이 이토 히로부미를 쏴 죽인 것을 죄악이라 결론 냈던 한국 천주교단이 1백년이 지난 뒤, 당시 상황이 정당방위였음을 인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의라는 대의(大義)와 살인이라는 윤리(倫理) 사이에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 소설 [죄와 벌]을 통해 안중근의 저격에 대한 죄와 벌의 인과(因果)를 살펴보는 마음으로 800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안중근은 1897년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은 후 6~7년간 황해도 일대를 돌며 선교한 독실한 신자였지만, 대한제국 천주교단은 안 의사(義士) 의거(義擧)를 단순한 살인으로 규정했다.
당시 한국 교회를 관장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안중근이 살인범 역도(逆徒)로 몰리게 되니, 국제사회 여론을 의식하며 초라해진 망국(亡國)의 분연(憤然)을 외면하였다.
오랜 세월 안중근 선생에 대한 한국천주교의 평가는 엇갈렸으나,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의 의거가 정당했으며 천주교 신앙과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맞는 2010년에는 교구차원에서 대규모의 추모미사를 가졌다.
정진석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추모미사를 열고 안중근의 신자(信者)신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안중근의 의거는 정의로운 행위로 인정되며, 안 의사(義士) 자신도 의거와 신앙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소설 [죄와 벌]은 인간이 지닌 내면의 심리를 그린 이야기로 인간은 늘 어리석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전해준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제기하는 “正義는 무엇인가?”라는 독백에서 그는 정의를 분석하고 논의하는 대신 여러 각도에서 스스로 정의를 단정 짓기도 한다.
『한 사람의 생명 덕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셈인데, 그 사악한 노파의 삶이 사회전체의 무게에 비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마리 바퀴벌레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빈곤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그들을 구제할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단정 지었다.
살인을 저지른 후 자신의 사상에 큰 모순이 있음을 깨닫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합리화를 하려고 애쓰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심리묘사가 매우 뛰어나, 형식적으론 추리소설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심리소설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만의 독특한 이론에 의해 인류를 나폴레옹과 이(벌레)로 분류했다. 선악을 초월해 비범하고 강력한 소수인간과 도덕에 얽매이는 약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분류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어떤 부류들이 있는데, 그들은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기보다는, 그런 짓을 행할 완전한 권리(權利)를 지니고 있고 또 그들에게는 어떤 법률도 적용되지 않는다.』 - 376p
--->러시아 귀족관리와 이토 히로부미 악정(惡政) 연상
그는 자신이 강력한 소수인간에 속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 마리 이(蟲)에 불과한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였다. 살인을 저지른 그는 순간 나폴레옹이 되어 헐벗은 자에게 행복을 주겠다는 착각에 젖기도 한다.
『비범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양심상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적인 신념을 옮기기 위해 요구되는 경우에 한해서 권리(權利)를 지난다. 즉 양심상 유혈(流血)을 허용한다는 점이다.』
---> 라스콜리니코프와 안중근이 갖는 정의(正義) 연상
나폴레옹이 되고자 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죄 없는 노파 여동생 리자베타마저 죽인 양심가책을 느끼며 자신을 잡으려는 사회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을 희생해 가족생계를 꾸려가는 매춘부 소냐를 보며 자신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열광적인 어조로 소냐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불합리한 세상을 헤쳐 나가며, 내던질만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을까? 라는 생각이 태양처럼 떠올랐던 거야! 그래서 노파를 죽였어. 나는 다만 감행하고 싶었던 거야... 그게 모든 것의 이유야!』 - 614p
라스콜리니코프는 8년의 시베리아 유형(流刑)을 살게 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그는 자신이 결국 범인(凡人)이란 한계를 깨닫고 자책하지만, 여전히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소냐의 감화(感化)에 의한 그의 종교적 갱생과 정신적 부활이 그려진다.
『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그는 사상과 희망을 위해서라면 수천 번 희생할 준비가 돼 있었다. 운명이 그에게 회한(悔恨)을... 끔찍한 괴로움 때문에 밧줄과 죽음의 심연(深淵)이 어른거리는 회한을 보냈다면 그는 그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범죄행위가 어리석거나 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 800p
소설 [죄와 벌]은 시작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며 고뇌와 긴장의 연속이 이어지면서 그가 범행을 자백하는 외침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서서히 죄를 깨닫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한다.
소설의 조연(助演)으로 빛나는 라주미힌(친구), 뽀르피리(예심판사), 두냐(여동생), 루쥔(두냐 약혼자), 스비드리가일로프(두냐를 짝사랑),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소냐 계모) 인물들은 심리적으로 심도 있게 그려져, 죄와 벌에 대한 작가의 깊은 내면과 철학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의 소설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킨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라스콜리니코프와 뽀르피리가 경찰서에서 각자 자신의 사상(思想)으로 충돌하는 대화의 모습은 이 소설의 절정을 이룬다.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죽인 죄에 대한 처벌은 정의를 실현하는 필요조건이라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분노는 정의를 촉발시킬 수 있지만 정의 자체는 아니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시종(始終)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작가는 한걸음 더 나가 정의를 완성시키는 것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이라는 사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하지만 용서와 사랑이 결여돼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네바(Neva)강에 빠져죽을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그는 결국 범인(凡人)의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자수를 택함으로써 이들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완결되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안중근 선생의 참된 용기와 나라사랑은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 正義라는 결정체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 壬寅年 구월 열 사흗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