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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1. 2015

조선왕릉 탐방

(08) 선정릉  Storytelling


가을의 절정인 듯 시월의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도시의 공원 선정릉의 하늘위에 수채화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이 눈이 부신 기분 좋은 계절 입니다. 선정릉 관리소에 전화를 걸어 능 촬영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집을 나섭니다. 왕릉 방문 순서를 짜놓고 방문하는데 계획대로라면 11월내 마칠 것 같네요.


선정릉에는 조선 9대 왕인 성종의 선릉(宣陵)과 11대 왕 중종의 정릉(靖陵)이 있습니다. 조선을 시대별로 나누어 보면서 9대 성종 조 까지를 전기, 18대 현종 조 까지 중기, 이후 27대 순종 조 까지를 후기로 나눠 글을 쓰고 있는데, 조선전기인 성종 때 까지가 조선 왕조의 제대로 된 치세가 이뤄졌다고 추정해 봅니다. 중기에 들어와서는 온갖 외세 침략과 약탈로 편할 날이 없던 세월 이였죠.


강남의 멋진 고층빌딩을 마주하고 있는 선릉

37세 승하한 성종은 12명의 부인을 거느렸던 조선최고의 정력가였습니다. 묘하게 같은 능역에 묻힌 중종도 부인이 12명 이어서 선정릉에 잠들어있는 이들 2명은 조선역대 왕 중 최다 부인을 거느렸던 행복한 임금 이었습니다. 살아선 가장 많은 여인과 함께했으며 죽어서는 대한 민국서 가장 비싼 땅인 강남에 묻혀 이승과 저승에서 최고만을 누리고 있는 두 임금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성종은 재위 25년간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정비 공혜왕후의 요절 후 윤씨를 계비로 삼았다가 행실을 문제 삼아 사사하였는데 이는 훗날 연산군 폭정의 계기가 되었죠.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공신들 세력에 눌려 이를 견제코자 신진 세력이자 개혁론자 조광조를 등용해 왕권강화를 꾀하였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습니다.



선릉과 정릉의 능상에는 왕의 시신이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파헤쳐져 재궁(榟宮)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성종과 정현왕후 능침에서는 잿더미만 나왔 중종 능침에서는 시신이 나왔다 하네요. 하지만 당시 조정은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해, 선조는 전란 후 시신을 다른 곳에 묻도록 명한 뒤 새로 지어올린 의복만을 관에 넣어 묻은 채 능을 보수했다고 합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인왕산 정상아래 동쪽에 여인의 치마를 넓게 펼쳐놓은 듯 한 치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중종 원비인 단경왕후와 관련돼 붙여진 이름입니다. 연산군 때  반정으로 중종이 왕에 오르자 박원종은 중종 부인 신씨의 친정아비인 좌의정 신수근을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이고 신씨를 폐서인하여 궁에서 내쫒았죠.


경회루에서 바라보이는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아래 사직골로 쫓겨나 살고 있던 신씨를 그리워하던 중종은 간혹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기슭을 바라보곤 했다지요. 이 말을 전해들은 신씨는 환궁에 대한 희망으로 신혼 때 입었던 붉은 치마를 경회루가 보이는 인왕산에 올라 매일 펼쳐놓았다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인왕산 중턱 병풍바위 앞에 우뚝 솟은 바위를 치마바위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 능 입구에는 붉은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과 능 언덕 사이엔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이 있습니다. 홍살문서 정자각까지 에는 참도(參道)가 있는데 왼쪽에 약간 높은 곳은 신이 다니는 신도며, 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어도라 합니다. 정자각 우측엔 왕 비석이 있는 비각과 능지기가 머물던 수복 방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왕릉을 늦깍기 나이에 비로소 찾아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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