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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1. 2015

조선왕릉 탐방

(09) 태강릉, 의릉  Storytelling


주말은 결혼식 참석으로 바쁘기에 왕릉탐방은 평일을 활용해야 하는데 중요한 일도 없으면서  반백수가 바쁘기만 합니다. 왕릉의 파란잔디가 금색으로 변하기 전 서둘러 부지런히 사진에 담아 두려합니다. 하여 오늘은 예배를 마치고 공릉동 태강릉과 석관동 의릉을 방문했습니다.  

   

태릉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가 묻힌 곳입니다. 제1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죽자 이어 왕비로 책봉됐는데,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아들 명종을 즉위시켜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위세를 떨쳤던 왕비입니다. 중종은 생전에 제1계비 옆에 묻히기를 희망해 사후 장경왕후 능 오른쪽 언덕에 묻히고 능호가 정릉(靖陵)으로 정해졌죠.


문정왕후의 권력이 느껴지는광대한 능역을 갖춘 태릉 전경

하지만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명분으로 명종17년에 선릉 옆으로 중종을 천장시켰습니다. 이를 실행코자 승려 보우를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했으나, 정릉의 지대가 낮아 해마다 장마철 한강이 넘쳐 재실까지 물이 차는 바람에 보토(補土)하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에 홀로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 명종은 태릉에서 1Km 떨어진 강릉에 묻혀있습니다. 이곳은 삼육대학정문 옆에 위치해있는데 관람 비공개지역이라 하네요. 따라서 대학 안으로 들어가 펜스를 올라타고 넘어가 강릉을 염탐했습니다. 퇴직이후 금지사항만 골라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네요. 이어 옛 중앙정보부가 있던 석관동 의릉을 방문했습니다. 경종은 숙종의 장남이자 장희빈의 자식이죠.


왕릉출입이 봉쇄되어  쓸쓸함이 더해 보이는 강릉   

죽어서도 왕 가족능역으로 가지못가고 근세에는 정보부에 둘러싸여 비공개됐던 의릉은 1996년 5월 개방됐습니다. 1962년부터 1995년까지 중앙정보부가 의릉 안에 위치해 있었죠. 이곳에 중앙정보부 강당은 1972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이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장소로써 남북간 화해의 지평을 열어놓은 중요한 역사적 현장입니다.      


오랫동안 신성시해야 할 왕릉 능역 안에 중앙정보부가 위치해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던 암울했던 시절을 잠시 떠올려 봅니다. 병약했던 경종은 힘이 없던 왕인지라 수호석물도 사람 키 정도로 세워져있네요. 강릉은 왕과 왕비 능을 상하로 배치한 상하이봉릉으로 조성했는데, 이는 쌍릉처럼 좌우로 능을 조성할 경우 정혈을 벗어난다는 풍수설을 따랐기 때문이죠.


위아래로 배치된  상항이봉릉인 의릉

왕릉은 단독으로 조성되는 경우와 여러 왕릉이 무리를 이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 조선조에는 풍수설에 따라 능지를 선정했기 때문에 자연히 입지가 좋은 곳에 왕릉이 모여들게 됐습니다. 또한 왕릉은 경기도지역에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도성 안에는 무덤을 쓸 수가 없어서 왕릉참배가 용이토록 가까운 경기도에 능지를 잡았죠.


따라서 왕의 하루 행차거리인 도성 100리 안에 능지를 택했는데, 유독 여주에 있는 세종릉은 강을 따라 뱃길로 100리 라는 명분을 세워 천장한 경우였죠. 예외적으로 북한 개성에 정종 능이 있고 비운의 단종 능도 영월에 있습니다. 무덤은 3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왕의 무덤은 , 세자, 세자빈 왕자를 낳은 후궁의 무덤은 , 사대부와 평민 무덤은 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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