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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자족

by 한주


비움과 自足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켜왔던 고풍(古風)스런 물품들... 그것은 아주 오랜 세월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지금도 그곳에 있으며 앞으로도 보이지 않는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을 것들이다. 부모님이 안 계신 작금(昨今), 그것은 내게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져 차마 이별치 못하고 지니고 있는 것들로 제법 남아있다.


이미지001.jpg 보관 중인 60년대 사기그릇

결혼 후 지방점포 발령 등 이러저런 이유로 여덟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1996년에 비로소 정착했던 지금의 과천 집은 자식들을 초등학교에 보내며 홀로 되신 부친의 임종 전까지 함께 살았고, 두 아들 모두 제 짝을 찾아 분가(分家)한 뒤 세 명의 손주까지 맞이하며 30여년 세월을 보듬어준 정든 집이다.


이미지002.jpg 두 며느리를 맞이한 花紋席

온갖 희로애락을 간직한 채 평온히 살아왔던 집이 재건축되면서 곧 이사를 앞두고 있다. 34평으로 이사 간다는 핑계로 이참에 살림살이를 대폭 줄이려고 하는데, 초로(初老)를 넘어선 탓인지 이사준비를 하는 것이 용이치 않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어떻게 버려야 할런지 마음만 앞서며 괜스레 분주해진다.


이미지003.jpg 60년대 3단 장
이미지004.jpg 80년대 혼수이불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렀던 버려야할 물품들을 대상으로 아내와 실랑이 끝에 3단(段) 자개장과 돌절구, 맷돌, 항아리 그리고 혼수용(婚需用) 공단이불도 더는 보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오래세월 모친의 손길이 닿았던 것들을 아파트 공간에서 계속 보관 하겠다 고집하기에는 아내에게 더 이상 면목이 서질 않는다.


이미지004.jpg 맷돌

그밖에 1960년대 식기(食器)가 몇 개 남아있고 단지로 사용했던 청화목단(靑畵牡丹) 도자기도 한 점 남아있다. 밥그릇에는 복을 빌고 건강과 장수를 염원하는 福(복)과 壽(수)인 길상(吉祥) 문양이 있고, 잡귀를 물리친다는 소금단지는 투박한 모란이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버려야할지 결론짓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005.jpg 청화목단 단지

쌀이 귀했던 1960년대 밥그릇은 500㏄이상 크기로 배고팠던 한국의 전후(戰後)시절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는 450㏄로, 2010년 이후에는 250㏄로 작아졌는데, 이는 눈부신 경제발전과 함께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대신 빵과 고기 등의 소비가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식기 크기에서도 알 수 있음이다.


이미지006.jpg 60년대 밥공기(右)

며칠 고민 끝에 식기는 밥공기, 국 대접, 무색 테두리를 두른 접시 각 1개씩만 남기고 모두 쓰레기봉투에 넣어 정리했다. 큰 항아리는 교회성전(聖殿) 식당으로 보내고 절구와 맷돌, 작은 항아리는 이웃집이 자신의 주말농가 앞마당에 갖다놓겠다고 하니 제법 많은 물품을 정리한 듯싶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미지007.jpg 돌절구

모친의 소천(天) 후 31년 만에 남아있던 유품을 모두 정리한 셈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고집으로 브라운관 TV와 70년대 다이얼 전화기도 지금껏 보관하고 있기에 집안 구석구석 잡동사니를 찾아내며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다. 해서 이번엔 아내가 원하는 대로 다 버리고 초서체액자 유품 하나만 남겨두기로 했다.


이미지009.jpg 70년대 금성 전화기
이미지010(萬衆悅服).jpg 萬衆悅服

이뿐만 아니라 책장구석 서랍에 먼지 쌓인 소장품들과 여럿 앨범 또한 30년만의 이사를 앞둔 나 자신을 질리게 한다. 어려웠던 60~70년대 청소년시절 수학여행을 가면 카메라를 갖고 오는 친구가 많지 않아, 함께 찍은 사진을 나눠주면 소중하게 간직하다보니 스마트 폰이 나오기 전까지의 앨범사진이 수북하다.


이미지009.jpg 50~60년대 단지

소싯적 부모님과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과 90년대까지 찍은 사진첩만도 10여권이었는데, 은퇴 후 꼭 필요하다 여겨지는 사진만 골라 5권의 앨범으로 정리했었다. 하지만 칠순을 넘겨 이사를 앞두다보니 모든 소장품들이 내 기억에만 좋은 추억일 뿐, 죽고 나면 자식들에겐 귀찮은 정리 대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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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에 걸쳐 5권의 앨범을 50장 앨범 1권으로 정리하고 앨범에서 빠진 사진들은 스캔작업으로 USB 메모리에 저장해 두었다. 친구, 지인, 직장동료들과 찍은 앨범 속 사진을 자식들이 본다한들 자기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 터이니 직장과 단체사진은 모두 빼내고 가족사진만으로 단출하게 정리했다.


이미지011.jpg USB에 저장된 사진

평소 펼쳐보지 않는 앨범들을 남겨둔들 자식들이 볼 리 만무(萬無)하니, 50~70년대 흑백사진이 앨범 한권에 들어가 있으면 언젠가는 빛바랜 사진이 신기해서라도 보지 않을까 나만의 착각에 또다시 빠져본다. 4권 앨범에 들어있던 수많은 사진들은 과감히 찢어 75리터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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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정리한 뒤에 장롱에 넣어두었던 종이상자를 꺼내 모친께서 꼼꼼히 보관했던 학창시절 생활통신표, 교과학습 발달상황, 크레용 색칠그림과 부친생전의 중요기록물 등을 꺼내어 어렴풋한 옛 기억을 떠올려보며 모두 스캐닝 해 저장하고 원본은 미련 없이 없애버렸다.


이미지014.jpg USB 폴더별 저장사진

청소년시절 일기장과 군 시절 편지묶음도 기억될만한 것만 추려내 스캔하고, 은행시절 남아있는 지점별 명암과 사령장 및 표창장까지 스캐닝 해 보관했다. 마지막으로 퇴직 후 주요 일간지와 인터뷰했던 신문들은 그 사이즈가 스캐너보다 훨씬 크기에 기술적으로 스캔한 뒤 종이로 된 것들을 남김없이 비웠다.


이미지15.jpg 2013년 조선일보
이미지014.jpg 2014년 서울신문

각종 보관서적 등을 중고서점에 팔거나 버리기를 실천한지 꽤나 오래됐지만 매번 물품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나면 그 소중함이 점차 감소되는 것은 나이 탓인 듯 여겨진다. 어느덧 자식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젠 내가아닌 자식들이 주인공이란 생각에 적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미지015.jpg 2018년 동아일보

세월이 흐르니 소중한 것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많은 변화를 느끼게 된다. 귀히 여기는 물품 중에 그 실체는 변함없지만 그 소중함을 바라보는 자신의 변화는 집착을 버리고 무상(無相)에 이르는 과정일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지만 그 속도에 너무 뒤처지지 않고 단출하게 비우며 살아가는 삶이 이어지길 소망해본다.


진정한 부자는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적게 원하는 자이다. - 乙巳年(2025) 하짓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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