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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Feb 02. 2016

사라짐에 대한 단상


사라짐에 대한 斷想
    

2012년 7월 서울시내 극장 하나가 문을 닫았다. 서대문아트홀은 그나마 서울에 단 하나 남아있던 대형 단관(短觀)극장 이었기에 많은 아쉬움을 남게 한다. 이곳은 어느 누군가에겐 [화양극장]으로 기억되고, 또 다른 세대에게는 [드림시네마]란 이름으로, 고령층 어른들에겐 [서대문아트홀]이란 이름으로 기억되던 곳이다.


서대문은 내가 정년퇴직 후 새로운 삶에 둥지를 튼 사무실이 위치한 곳이고 서대문 지하철역 출입구를 드나들 때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서대문아트홀이었다. 이곳을 지나치며 아트홀을 찾는 노인들을 볼 때면 나도 언젠가는 추억어린 명화(名畵)를 보기위해 청춘극장을 찾을 날이 있겠거니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서대문아트홀]은 1964년 화양극장이란 이름으로 개관한 곳이다. 사실 60, 70년대만 해도 한국사회는 서민들이 즐길만한 문화가 딱히 없었기에 영화는 많은 호황을 누려왔다.


1960년대 말 왕우(王羽)의 "외팔이" 시리즈로 시작해 1970년대 이소룡의 "정무문(精武門)"과 "용쟁호투(龍爭虎鬪)"에 이어 1980년대 주윤발의 "영웅본색"등의 홍콩영화 붐이 불때까지만 해도 사대문 안에 영화관은 꽤나 호황을 누려왔다.


하지만 1990년에 들어서며 컬러TV의 폭넓은 보급과 멀티플렉스영화관 등장으로 기존에 단관극장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대기업 CGV를 시작으로 멀티플렉스가 체인화 되면서 스카라(1935년 개관)와 중앙극장(1934년)이 문을 닫았고, 명보(1957년)와 허리우드극장(1969년)은 현재 문화공연 전용관으로 바뀌었다.


1969년  돌아온 사나이 외팔이  왕우(王羽)

종로의 대표적 극장인 단성사(1907년)는 2008년 부도로 넘어가 보석전문복합상가로 바뀌고, 피카디리(1958년)는 [롯데시네마]로 바뀌면서 四大門안에 대형극장들의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단성사는 우리나라 영화문화가 들어왔던 초엽부터 종각 부근에 있던 우미관(1912년) 및 조선극장(1922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었다.


일제치하였던 1930년대 이 세 곳은 영화관의 주역으로 떠올랐으나 조선극장은 1936년 화재로 소실되고 우미관 역시 6.25전쟁 때 소실돼 [단성사]만이 그 명맥을 이어왔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당시 종로에 있던 극장들의 유명세만큼이나 세 극장을 중심으로 당대의 주먹들이 군림했었는데 그들은 자신을 주먹신사로 지칭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협객으로 불리었다.



당시 김두한은 우미관 뒷골목에 진출해 조선극장 뒤 터에서 구마적을 제압하고 종로를 비롯한 스카라극장이 있던 을지로구역을 차지한 후 전국 주먹들과 싸워 스무 살 때 전국의 오야붕이 되었다한다. 해방 후 1960년대 종로의 김두한과 동대문에 이정재를 논하던 시절 [스카라극장]은 정치 깡패인 임화수가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사회에서 주먹을 부를 때 협객이 아닌 깡패라고 부르게 된 것은 3대국회 때 조병옥과 장택상이 장충단서 국민투쟁위원회 강연을 할 때에 생겨났다. 당시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패거리들이 깡통에 자갈을 집어넣고 조병옥이 강연을 할 때면 깡통을 두드려 야지를 놓고, 깡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지르며 난동을 부려 이후 주먹패거리들을 깡패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스카라극장 원형스타일 극장의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문화재청이 문화재 지정을 하려다가 극장 건물주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스카라 극장 철거(2005년) 전후 사진

그밖에 四大門 안에 있던 극장 중 을지로3가 파라마운트(1964년)는 이후 [판코리아 나이트]로 바뀌었고, 을지로4가 국도극장(1945년)은 [국도호텔]이 들어섰고, 광화문 국제극장(1956년)은 [롯데관광 본사] 빌딩이 들어서 있다. 이제 우리네 청소년시절 추억의 이름을 간직한 영화관은 대한극장(1956년) 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지난날 영화관 최초로 70mm 영사기를 도입했던 [대한극장]은 중고교시절 중간시험이 끝나면 단체관람을 했던 극장이다. 60년대에 대한극장은 초대형 스크린에 최첨단 음향시스템을 구축한 유일한 극장이었다. 건물규모가 컸던 까닭에 8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거듭나 지금까지 대한시네마 이름으로 남아있다.


지난날 을지4가에 있던 국도극장 전경

서대문의 화양극장 역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 폐관 위기에 처했으나 [드림시네마]라는 시사회 전용관으로 운영되다가 2009년 서대문아트홀로 간판을 바꿔달며 그나마 노인들을 위한 실버 영화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간에 [서대문아트홀]을 운영해온 극장주는 2009년 허리우드를 실버 영화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서울시는 2010년부터 [서대문아트홀]을 임차해 [허리우드] 극장주에게 노인전용 극장인 청춘극장을 운영토록 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건물주가 바뀌면서 최근 서울시가 [서대문아트홀] 자리에 관광호텔을 짓는 것을 허가함에 따라 48년 만에 전신(前身)인 화양극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2012년 7월 사라지게 된 [서대문아트홀]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바로 앞에 위치하며 추억의 명화를 2,000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상영해 노인들에게 좋은 문화공간의 역할을 해왔다.


흑백 국산영화에 길들여져 있던 어린 시절 컬러영화였던 "벤허"와 "십계" 등을 보면서 옛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었던 서대문아트홀에서 마지막 영사기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하며 四大門 안에 단관극장이 사라져가는 아쉬움에 더해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국가가 나서 보전가치가 있는 옛 건물을 특별 문화재로 지정해 보려고 한다지만, 돈이 되지 않는 사업을 접으려는 건물주를 강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70년 대  낙권상가 허리우드 극장

다행히도 허리우드극장 자리에 실버전용 극장이 아직 남아 있다지만 낡은 [낙원상가]가 언제 헐릴지 모를 일이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디지털기술로 인해 아득한 아날로그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 들어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라져가는 문화공간을 못내 아쉬워하는 작금(昨今)의 노인들처럼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이 다가올 베이비붐 세대의 부메랑이 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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