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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Feb 13. 2016

아날로그 낭만


아날로그 浪漫


종로3가 뒷골목 피마(避馬)골을 지나던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정신없이 뛰다보니 청춘다방이란 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내부인테리어 포스가 가볍지 않고 제법 지난 세월의 추억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분위기에 다방이 나타난다.


여러 고풍스러운 소품들을 비롯해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DJ박스에 LP음반 등 빈티지한 소품들이 가득하다. 70, 80년대 복고에 대한 향수를 물씬 느끼게 하는 다방은 마치 영화 "써니"의 주인공 첫사랑 추억이 그려진 음악다방을 떠올리게 한다.



수천 장이 넘는 LP판이 빼곡히 들어찬 박스와 LP레코드 턴테이블을 만지는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60대 DJ모습에서 70년대 어느 다방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이순(順)을 넘긴 나도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종이쪽지를 뽑아 존 덴버의【Sunshine On My Shoulders】등 서너 개  신청곡을 적어 종업원에게 전해준다.


이곳을 찾은 많은 중장년들은 자신의 신청 음악이 나오면 흰 수염 DJ에게 고마움에 박수를 보내고 어느새 음악을 즐기는 모습에서 지난날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본다.



 내용은 평소 꿈꿔오며 해보고 싶었던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시니어전용 음악다방과 시니어 DJ 모습을 연상하며 긁적여본 글이다. 요즘 한집건너 보이는 것이 카페인데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카페는 상쾌한 아침을 여는 모닝커피와 지친일상을 깨우는 달콤한 커피를 마시거나 친구와의 약속 또는 과제나 일을 하기 위해서도 머무는 곳이다.


지난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카페대신 다방이란 공간이 주로 만남의 장소로 사용됐었다. 젊은 시절의 다방은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친구들과 만나 떠들었던 곳이었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미래를 사색하던 곳도 다방이었다.

 

1974년 라떼는

세월이 흘러 요즘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거나 미래를 내다볼 시간조차 없이 너무나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는 디지털 세상이다 보니, 액티브 시니어들을 위한 아날로그 음악다방을 창업해 골든타임에 직접 LP앨범을 선곡하는 시니어 DJ를 꿈꿔보기도 한다.


시월 어느 날, 서울시내 [을지면옥]에서 편육과 함께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들고 평양냉면을 먹고 나오다 바로 옆 건물에 옛 추억을 느끼게 하는 [을지다방]을 찾았다. 최근 시중에 넘쳐나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달리 70, 80년대 만남의 장소였던 다방이란 간판을 보니 깊은 정겨움이 묻어나온다.



이곳은 지난날에 【을지다실】이란 이름으로 22국과 28국의 전화번호를 넣은 성냥 광고사진이 인터넷 공간에 남아있는 다방이기도 하다. 2층 계단을 올라 다방 문을 들어서니 실내소품과 다방 분위기도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소리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시련의 달콤함이야 잊겠냐마는, 왠지 한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의 낭만에 대하여..."


머리속을 맴도는 노랫말처럼 따뜻하고 사람향기 나는 옛 다방은 오래된 세월을 거스르거나 바꿀 생각도 않고 그대로 지켜오고 있기에 더욱 반갑고 낭만적인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시내에서 거의 사라진 다방은 우리네 젊은 시절 푹 꺼진 소파에서 눈치 보지 않고 마구 담배를 피워대며 많은 시간을 보내던 공간이었다.



다방이란 간판에 끌려 【을지다방】에 잠시 머물러있는 동안 잠깐 과거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다. 소싯적 아버지를 따라 커피대신 쌍화차 또는 계란반숙을 먹었던 희미해진 기억이 새롭고 겨울날이면 다방 난로 위에 낡은 주전자로 끓여낸 엽차와 함께 홍차에 위스키 한 방울을 넣어 마셨던 추억도 되살아난다.


벽에 걸려있는 메뉴를 살펴보니 세월이 흐른 탓인지, 도라지 위스키는 찾아볼 수 없고 커피 한잔에 2,500원, 아이스커피는 4,000원이다. 마담에게 예뻐 보인다며 농을 건네자 시원한 얼음물을 건네며 자기는 아무에게나 서비스를 건네지 않는다고 맞받아친다.



이곳은 1958년부터 영업을 시작하여 58년간을 이어왔다는데, 다방이란 이름만으로도 낭만이 깃든 귀하고도 귀한 보물 같은 찻집인 셈이다.


을지다방의 분위기가 일반적인 서민들이 출입하던 다방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대학로 인근에 있는 【학림다방】은 시인들과 저항운동권 인사들이 드나들던 1950년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찻집으로 남아있다.



학림(學林)60년 된 유명한 다방으로 기성세대에게는 문화의 향수를 일으키고 신세대에게는 과거시대의 문화 정서를 공유케 하는 찻집이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3번 출구 마로니에 공원 맞은편에 위치한 학림다방은 1956년부터 이곳에 위치해 변화무쌍했던 서울도심 한복판에서 시간이 멈춰선 듯 한 풍경을 간직한 곳이다.



젊은 지성인들이 모여드는 서울문리대 제 25 강의실이라 불리며 문리대 축제인 "학림제"도 이 다방에서 유래됐다 한다. 특히 지난날 민주화운동 토론장이었고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학림은 천재 작가 전혜린이 자살하기 전날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셨던 곳이었으며 백기완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는 유명세를 타는 곳이기도 하다.

     


4.19와 학림사건 등의 역사를 간직하며 여전히 찻집으로 남아있는 학림은 천상병, 김지하, 황석영 등의 문인들이 오가던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은 문화 일번지에 위치한 탓인지 옛날의 다방 커피대신 로스팅 원두커피를 판매하면서 나름 고급 커피숍으로 변모해 있다.


學林茶房

학림다방 입구에는 한 시인의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있다.「학림은 아직도 여전히 60년대 언저리의 남루한 모더니즘 혹은 위악(僞惡)적인 낭만주의와 지사(志士)적 저항의 70년대쯤 어디에서 간 서성거리고 있다. 나는 어느 글에선가 학림에 대한 이러한 느낌을 "학림은 지금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현재의 시간위에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붙잡아 매두려는 위태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라고 썼다.」



「이 게임은 아주 집요하고 완강해서 학림 안쪽의 공간을 대학로라는 첨단의 소비문화의 바다 위에 떠있는 고립된 섬처럼 느끼게 할 정도이다. 말하자면 하루가 다르게 욕망의 옷을 갈아입는 세속을 굽어보며 우리에겐 아직 지키고 반추해야 할 어떤 것이 있노라고 묵묵히 속삭이는 저 홀로 고고한 섬 속의 왕국처럼.


이 초현대, 초거대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 1970년대 혹은 1960년대로 시간이동 하는 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데가 몇 군데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 잔의 커피와 베토벤쯤을 곁들여서... 」


그밖에 서울에서 다방으로 남아 제법 알려진 곳은 신촌역 3번 출구에서 나와 연세대학교 방향으로 5분거리에 있는【독수리다방】으로, 1971년에 문을 연 뒤 오랜 시간 대학가 음악다방으로 알려졌던 이곳은 우리세대들의 청춘에 이정표로 남아있는 곳이다.



지난 33년간 신촌 명물로 자리를 지키다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음악다방이라는 존재가 사라지게 되면서 문을 닫았었다. 하지만 옛 독수리다방 주인의 손자가 유학을 하며 낯선 타국에서 청춘을 보냈던 당시에 자신의 어린 시절 할머니가 운영했던 다방을 통해 보았던 70~80년대 시절 대학생 형과 누나들의 낭만을 동경했었다 한다.



이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낭만과 여유를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문득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곳,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생각해 과거 추억과 낭만을 품고 있는 독수리다방을 2013년 1월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영세창업인 70%가 3년 안에 폐업을 한다는 요즘, 아날로그 낭만이 깃든 청춘다방을 연상해보는 것이 나의 헛된 꿈일지라도 때때로 젊은 날로 회귀하고픈 액티브 시니어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마련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라도 서울시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Sunshine On My Shoulders】- John Denver  

https://www.youtube.com/watch?v=diwuu_r6G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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