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회
에세이는 혼잣말처럼 써내려 갔지만, 에필로그는 제목과 같이 편지의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말을 높이겠습니다.
[에필로그]
목차를 구상하던 처음이 떠오르네요. 내가 겪은 일, 그 안에서 느낀 감정과 조금이나마 읽는 분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담아야지 하는 소박한 바람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1화부터 완주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여쭤보고 싶어요. 혹시 저와 같이 우울증과 ADHD로 고민을 하시는 분인지, 병명을 확진받기 두려워 증상이 있음에도 병원에 방문한 적 없는 분인지, 아니면 그냥 에세이를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은 분인지. 어떤 분이 읽더라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이길 바랍니다.
사실 공개된 플랫폼에 내 얘기를, 특히 정신과 관련한 이야기를 소상히 풀어낸다는 것이 어려웠어요.
누구나 마음에 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벽은 과녁 같이 제 마음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어요.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는 외벽, 조금 친해지면 대문을 열어 그 안의 더 내밀한 벽을 보여주고, 가장 친근한 사람에게는 제 마음에 엑스텐을 꽂아 넣을 수 있도록 활짝 개방해 두기도 해요.
여러분에게 어디까지 내 마음의 벽을 허물어 보여줄 수 있을까, 여기까지 보여줘도 되는 걸까, 너무 상세하고 자세한 묘사가 훗날 나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어요. 하지만 글을 쓸 때, 리드는 머리가 아니라 손가락이 합니다. 일단 손가락이 이끄는 대로 쓰고 나면, 이후에 머리가 '아, 여기까진 괜찮겠다.', '이건 읽는 사람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 '이건 날 상대방 입장에서 상처받을 수 있겠다.'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이미 적은 내용을 삭제하거나 완곡하게 수정하기도 해요. 저의 아픔을 서술하기 위해, 남을 아프게 하는 건 최대한 지양하려고 했습니다.
그럼 솔직한 얘기가 아니지 않냐고요? 저는 화장실에 얼마나 자주 가는지에 대해, 또 화장실 때문에 수능을 망친 얘기도 썼는걸요! 정말 친한 사람한테만 하는 은밀한 얘기를 털어놓은 거니, 독자분들과 제 사이에도 친구만큼의 라포가 형성됐을 거라 믿습니다. 또 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해야 솔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특히나 글은 제가 삭제하지 않는 이상 평생 남는 것이고, 삭제하더라도 이미 읽은 사람의 머리에 내용이 남기 마련이니까요. 제 자신에 대해 부족하게 묘사한 내용은, 훗날 돌아봐도 스스로 감내가 가능하지만, 타인에게 상처 주는 묘사는 나만의 후회로 지울 수 있는 자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민들로 글을 써내려 갔던 것 같아요.
저는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제 성격이 왜 이렇게 형성되었는지, 내가 어떤 것에 아파하는지, 왜 반복적인 우울증을 겪는지 심도 있게 알게 되었어요. 성격 형성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청소년기의 얘기를 다루려면 제게 너무나 소중한 가족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이전에도 얘기하지 않았고 지금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유는 위에 설명한 것과 같아요.
제가 사회생활을 하며 가장 크게 힘들어했던 부분은 인간관계인데요. 사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두가 각박한 현실 탓에 남을 쉽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생존을 위해 감각을 예민하게 진화한 과거와 달리, 점점 감정이 예민하게 진화하는 것 같아요. 새로운 인류의 출몰 같다고 할까요. 이모셔널 사피엔스. 네, 제가 지었습니다.
저는 이제 타인과 겪는 불화도, 사실은 내가 상대에게 내면의 결핍을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이제 웬만하면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걸 깨닫고 내면화하기 위해 전문의와 오랜 상담을 거쳤어요. 여러분도 타인의 특정 행동, 말투, 표정이 못 견디게 힘들다면 자신의 삶을 살펴보시길 바라요. 내가 살아오며 어떤 것에 결핍을 느끼는지, 누구를 통해 그런 압박과 고통을 느꼈는지. 아마 한 명이라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지금 불화를 겪고 있는 상대에 투영해서 바라보는 것일 거예요.
예를 들어, 사과라는 사람이 있어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했고, 달콤하지만 때론 너무 단단한 면이 있어 내 앞니를 아프게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참외가 와서 앞니를 톡톡 칩니다. 저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요. 다른 사람은 참외가 앞니 톡톡 건드는 게 기분이 나쁘지만 이렇게까지 못 참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보여요. 그런데 나는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눈물이 나고, 원망스러워요.
그럼 잠시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세요. 나는 참외한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내 치아를 어린 시절부터 아프게 했던 사과한테 화가 난 것이다. 그걸 참외가 상기시켰을 뿐이고, 사과를 향한 분노까지 가중된 것이다. 참외와 사과를 떼어놓고 생각하자. 둘은 다른 사람이다. 그럼 신기하게도 화가 내려가요. 다른 사람처럼 좀 기분 나쁘네? 정도 하는 수준까지 감정이 내려갑니다. 그 상태가 되면, 차분하게 참외에게 내 치아를 건들지 말아 달라고 요구할 수 있어요. 참외는 제가 그렇게까지 기분 나쁠지 몰랐기에, 오히려 정중한 내 모습에 미안함을 느낄 거예요.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생각을 거쳐 상대와 나, 모두에게 괜찮은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어요.
이런 내면화 과정을 거치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여러분도 현재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을 전환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물론, 상대가 지나치게 무례하거나 범법 행위를 저지를 경우엔 단호하게 행동하세요. 내면의 결핍이고 뭐고, 그건 상대가 잘못한 게 맞아요.
이 브런치북을 읽으며 조금이라도 공감이 되셨다면, 우울증 환자 또는 ADHD 환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셨으면 그걸로 제 할 일은 다한 것 같습니다. 제 증상이 모든 환자를 대변할 수 없고,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저는 항상 글 말미에 같은 증상을 겪으시는 분들이 있으면 병원에 내원하라고 권유해요. 사람마다 원인과 증상, 치료 방법이 다르니까요.
정신과 치료가 보편화되어 병원에 출입할 때마다 상가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보는 시선이 대수롭지 않아 지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일부러 더 당당하게 들어갑니다. 뭐, 불만이야? 아니면 불쌍해? 불쌍하면 내 얘기 한 번 들어볼 텐가? 하는 마음으로요. 네, 사실 허세입니다.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길게 못합니다.
어쩌다 보니 행복 전도사가 된 것 같지만, 모두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일, 기쁜 일, 엄청난 일 말고요. 저처럼 내 결핍이 뭔지 이해하는 것도 행복이고, 그걸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도 행복일 수 있거든요!
그럼 우리 이제 정말 행복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