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약을 거르지 맙시다.
앞선 에피소드에서 말했듯이 나는 ADHD 환자 치고는 일상적인 부주의가 적은 편이다. 그렇게 믿어왔다. 검사 결과에서도 집중력에는 문제가 없었으며 부주의로 인한 사고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어느 날, 약 봉투 챙기는 걸 완전히 깜빡한 채로 아침 일찍 약속을 나갔다. 하루 종일 메디키넷을 복용하지 못했다. 두통, 치통, 생리통처럼 약을 먹지 않으면 통증이 발생하니, 외출 시 약을 꼭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었다. 그리고 무언가 챙기는 걸 깜빡하는 건 ADHD의 흔한 증상이기도 하다.
그날은 탱이와 함께 복합 쇼핑몰에 간 날이었다. 평소처럼 아이쇼핑을 하고 맛있는 걸 먹었다. 문득 내가 지나가는 사람들에 치이고, 음식을 흘리면서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내가 혼잣말처럼 "오늘 약을 안 먹어서 그런가."라고 중얼거리자, 탱이는 "약 안 먹었어?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답했다. 내가 "약 먹을 때랑 안 먹을 때가 달라?"라고 묻자, 탱이는 "내가 보기엔 많이 달라."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내 안에 변화에 대해 심도 있게 관찰했다. 어떤 부분이 부주의한지, 약을 먹으면 어떻게 보완이 되는지 스스로 느껴야만 약을 거르지 않고 챙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용 전후 증상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위 표에서 왼쪽 증상을 느끼는 분이라면 고민하지 말고 ADHD 진단을 받기를 권장한다. 약을 먹고 증상이 줄어들면 내 머릿속에 조수가 한 명 생긴 느낌이랄까? 평온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이 나를 돕는 기분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특히 나와 같이 소설도 같이 쓴다면 소재 고갈, 상상력 저하에 대한 공포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약을 먹기 전에 구름처럼 떠다니는 소재들이 사라질까 막연히 두려웠는데, 두 가지 요소가 이를 보완해 준다.
우선, 메디키넷의 지속 시간은 4~6시간이다. 하루 24시간 중에 길어도 12시간만 약효가 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머릿속에 구름이 떠다닌다. 내게 주어진 12시간의 구름 안에서 소재를 잘 택하면 된다.
나는 매일매일 소재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다만, 어느 날 벼락 맞은 듯 머리를 관통한다. 그 벼락이 구름이 떠다니는 그 12시간 안에 내리치길 바라면 된다. 소재가 떠오르면 단번에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까지 모두 떠오른다. 약효가 떨어진 상태라도 메모장 또는 노션을 켜서 소재를 정리하여 적는 것은 가능하다. 스토리라인을 매끄럽게 정리하거나, 결말을 맺는 건 다음날 차분한 컨디션으로 다시 하면 된다. 벼락 같이 떠오른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소재를 좋은 글로 표현해 내는 시간은 약효가 도는 12시간이면 충분하다.
"이 글을 읽는 작가님들, 하루 12시간 이상 글을 써보신 적 있으신가요? 솔직하게 저는 없습니다. 약을 복용하기 전에도 최장 5시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12시간 동안 글을 쓸 수 있는 동력과 마음가짐이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물론 약을 먹으면 바로 12시간 내내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식사를 하거나 잠시 밀린 연락을 확인하는 사이에 집중이 흩어진다. 그렇지만 약을 복용했을 때 가장 좋은 점은 다음에 나올 내용이다. 잠시 집중력이 깨지더라도 '이제 그만하고 글 써야 돼.'라고 마음을 먹으면 내 의지만으로 작업대에 앉을 수 있다. 그리고 글을 쓰다가 막히는 날에는, 그 집중력 그대로 이어서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거나 언어 공부를 할 수 있다. 비로소 나는 시간을 효율적이고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 자신에게 방해받지 않고 말이다.
이처럼 어설프고 부주의하던 내가, 정상적인 일상을 너머 체계적으로 구상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약을 꾸준히 복용해야 하는 단단한 동기가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메디키넷과 프록틴을 복용한다. 시원한 물이 목을 스치면 빠르게 잠이 달아나고 머리가 맑아진다. 그렇게 뇌에 시동을 걸고 노트북을 켜 작업을 한다. 필요한 경우, 밖에 나가서 기분을 환기한다. 밖은 새로운 경험들과 사연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지나가는 단면만 본다. 나는 찰나에 그 사람이 왜 그런 표정을, 말을, 행동을 했는지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림은 기억하지 않고 흘려보낸다. 강하게 남은 기억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떠올라 글이 된다. 하루하루 차곡차곡 저장한다. 더 이상 휘발하지 않고, 막연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