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ADHD를 조종하는 흑마법사
브런치북을 연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어느새 익숙해진 내 병증이 나아지길 바랐다. 약 7개월간 꾸준히 약물과 상담 치료를 받아 증상이 서서히 좋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완치라는 개념은 먼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유의미한 것은, 기존 2주 간격으로 행해졌던 치료가 3주 간격으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약이 제 역할을 잘하고 있으니 상담 간격을 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다. 나도 이전 에피소드를 통해 말했던 많은 부작용을 잘 대응하고 적응했다.
아래는 내가 메디키넷과 프록틴을 복용하며 개선된 것들에 대한 목록이다.
<높은 정도의 개선>
우울감 감소
스트레스 감소
감정 충동 제어, 감정 변화폭 감소
감정 회복 탄력성 높아짐
과거에 대한 후회나 불확실한 미래의 걱정보다는, 현재에 포커스를 둠
나태 감옥에서 탈출. 일에 대한 내면의 동기 부여 가능
죽음에 대한 내면적 거리두기
<낮은 정도의 개선>
주의력 결핍에 의한 행동 개선
PMS와 생리 시 호르몬에 따른 우울감 개선
근육의 소운동(손으로 잡기 등 작은 활동) 기능 강화
트라우마 증상 발생 시 스트레스 받는 시간 단축
악몽이라는 부작용과 맞바꾸기에 충분히 좋은 조건 아닌가. 다행히 글을 쓰고 있는 목요일 현재 기준, 이번 주에 악몽을 꾼 횟수는 1회다.
정신과는 다른 진료과에 비해 높은 진료비와 약값이 들지만 치료받고 있는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 발병했을 때 병증을 자각하고 빠르게 병원을 찾았다면 이렇게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까지나 가정은 가정이다. 지금이 가장 치료받기에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면, 또 그렇게 살아진다.
우울증 환자 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면의 힘을 키우고 호르몬 작용을 정상화하여 약물 복용 없이도 이겨낼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는 것이다.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더는 밀려오는 감정에 압도되어 슬퍼하지 않고, 불안함에 눈치 보며 마음을 졸이는 일은 없다. 현재는 글 쓰는 일에 집중하고 있지만, 훗날 다시 직장이라는 차가운 생태계에 발을 디딘다고 해도, 이제는 스스로를 지키고 다독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ADHD는 뇌의 기능 자체가 약한 것이라 회복 개념이 다르다.
RPG 게임을 예로 들면, 던전에서 몹과 싸우다 보면 체력과 기력을 모두 조금씩 소진한다. 그때마다 회복 아이템을 먹어가며 싸움을 해나간다. 그런데 ADHD 환자들은 던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기력이 30%까지 깎여 있다. 이에 회복 아이템을 먹어 최소한 80%라도 기력을 채운 후 전투에 임해야 한다. 100%로 채우면 좋겠지만, 약의 기전이 어디까지 나를 올려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개인의 컨디션에 따라 같은 용량의 약을 복용하더라도 포텐셜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럼 단약을 할 수 있냐고? 높은 확률로 아니다. 어린 시절 ADHD 치료를 받으면 효과가 좋다고 하지만, 나와 같은 조용한 ADHD는 너무 오랜 기간 특정 기간 뇌 기능이 저하되어 있기 때문에 약물로 뇌 기능을 보조해야만 한다. ADHD 약은 뇌의 기능을 회복시켜주지 않는다. 보완해 줄 뿐이다.
예를 들어, 만약 손가락이 다쳐 구부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처 치료를 중점적으로 받아, 아물면 문제없이 구부릴 수 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손가락 근육에 문제가 있어 구부리지 못한다면, 이를 보완하는 장치를 착용해 구부릴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한다. ADHD 환자들은 후자처럼 태생적으로 기능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경우다.
물론 사람에 따라 증상이 개선되어 단약을 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대다수의 성인 ADHD 환자는 약을 건강보조제처럼 매일 복용해 저하된 기능을 보조해야 한다. 내 주변에 다수 포진한 ADHD 환자들은 대부분 증상 개선을 느끼지 못해 자의로 단약을 감행했다. 그리고 타인인 내가 관찰하기에는, 그들이 약 복용을 했을 때와 단약 했을 때 증상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나, 그들은 스스로가 단약의 불편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주관적으로도 개선점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기에 의학적 판단 없이 자의적으로 단약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병증 자체가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증상, 약효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가져가기 어렵다. 고열에 체온계로 온도를 재거나, 상처가 벌어져 피가 나는 것처럼 아픈 정도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내면을 잘 살펴야 하는데, 그런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아플 확률이 높으니, 자가 진단도 불가하다. 주관적인 기준을 두고 있다 보니, 컨디션이 좋은 날은 개선된 것 같고,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여전히 증상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로 단약을 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전문의의 소견을 존중하는 편이 좋다.
이제 더 이상 트라우마틱한 상황에 나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장 소중한, 나의 공간에서, 내면의 소리를 듣고, 가끔은 친구처럼 얘기를 들어주고, 가끔은 엄마처럼 달래줄 것이다. 내가 부족한 부분은 인정하되 꾸짖지 않을 것이고, 내가 잘한 부분은 겸손하지 않게 칭찬할 것이다. 그동안 반대로 살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약을 챙겨 먹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맛있는 걸 먹고, 즐거운 무언가 찾아 헤맬 것이다. 긍정적인 시간은 모두 내 안에 축적되어 하나의 알약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거라 믿는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 자신에게 가장 다정하길 바라며, 브런치북을 마친다. 그럼 이제 우리 행복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