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편하거든요..
형형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던 게 샘이 났는지, 이제 막 5월의 중턱을 지나고 있을 뿐인데도 이미 한여름 같은 더위가 찾아왔다. 쉬는 날 아침이라 조금 늑장을 부렸더니 어느새 8시가 다 되어간다. 조금만 더 늦게 나간다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뜨겁게 달궈진 땅 위를 달려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한다.
아무래도 한발 늦은 것 같다. 트랙 위에는 이미 5월의 햇빛이 뜨겁게 내려앉아 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 고민을 하긴 했지만, 한 달 동안의 달리기 스케줄을 이미 짜놨기 때문에 이대로 들어갈 수는 없다. 다행히도 선크림은 두껍게 바르고 나왔다. 한 시간 뒤 땀에 절어 힘들어하는 내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첫 발을 내딛는다.
간밤에 차게 식은 트랙 위로 부드러운 물결을 그리며 힘겹게 나왔던 지렁이들이 겨울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을 미처 피하지 못했는지, 대가리가 풀숲을 향한 채로 말라비틀어져 있다. 처음 달리기 시작했을 때보다 햇빛이 더 뜨겁다. 달려온 거리가 10킬로를 넘기고 나니 물 생각이 간절하다. 목 뒤가 발갛게 달아올라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이대로 멈춰서 어디든 들어가 시원한 음료수 한 캔 마시고, 찬물샤워를 한 뒤 낮잠 한 숨 자고 싶다. 하지만 나와의 약속이고, 오늘 정해둔 목표가 있기에 이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인다.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양손을 서너 번 털어낸 뒤 잠깐 동안 스쳐 지나간 유혹 때문에 떨어진 페이스를 다시 올려본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어려서부터 단체로 팀을 이뤄 서로 경쟁을 하는 그런 종류의 스포츠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아,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는 게 싫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잘했다고 해도 팀 전체가 잘하지 못했다면 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뭐가 됐건 졌다는 감정은 아무리 많이 마주하더라도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여기서 더 최악은 나 때문에 지게 됐을 경우다. 경쟁에서 진 것도 서러운데, 같은 팀원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죄책감까지 느끼게 되니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길 경우에는 그 순간이 너무 즐겁고 짜릿하고, 행복하지만 모든 경쟁이 그렇듯 항상 이길 수만은 없는 것이다. 경쟁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가 않는다.
반면, 자기 자신을 향한 도전은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이겨내거나, 한계를 극복해 내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어떤 목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과정이 더 힘들거나 시간이 오래 걸릴 수는 있겠지만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뤄낼 수 있다. 그리고 중간에 한 번쯤은 실패를 맛보기도 하고, 원했던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괜찮다. 버틸 수 있다. 어차피 나 자신과의 싸움이니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잠깐동안 힘들어한 뒤 털고 일어나서 다시 도전하면 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했었던 것 같다. 결국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였다. 오랜 시간 동안 더 멀리 달리는 일은 나의 한계를 향한 도전이다. 물론 엘리트 러너들에게는 순위권 경쟁이 중요하기 때문에 달리는 것 자체가 경쟁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와 같은 아마추어 러너들에게 순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순위보다는 어제보다 더 멀리,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됐는지, 그리고 어제의 나보다 더 성장했는지, 그게 더 중요한 것이다.
경쟁과 도전은 서로 닮아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나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도전은 적어도 경쟁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진다는 것에 대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내 성향에 더 잘 맞고, 나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준다. 그래서 나는 경쟁보다는 도전하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또 하나 찾게 되었다. 하얀색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아 글을 쓰면 쓸수록 달리기의 매력에 더 깊이 빠지게 된다. 가만히 앉아 글을 쓰면 달리기가 더 좋아진다는 말이 뭔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사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아무래도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벌거벗은 나의 마음과 마주하게 되는 값진 순간을 선사해 주는, 참으로 멋진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