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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Aug 18. 2015

대량학살로 사라진
태즈메이니아 늑대

타이완, 타이베이 101, 508미터

Taipei 101 in Taipei And Tasmanian Tiger, watercolor on paper, 76 x 57cm, 2014


사실 다른 종의 자원을 빼앗아도 괜찮다면 다른 인간들의 자원을 빼앗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종을 착취하는 게 좋은 일이라면 다른 인간을 착취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 톰 하트만 지음, 김옥수 옮김, 아름드리미디어(1999), p.106.


1803년, 영국인이 죄수와 정착민, 개와 양을 데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즈메이니아 섬에 상륙했다. 섬은 곧 악명 높은 유형지가 되었고 목초지가 끝없이 펼쳐진 섬이라 양 축산업도 날로 번성했다. 그러나 탈출한 죄수들이 산적이 되어 양을 훔쳤고 목장에서 도망친 개들과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들도 양을 잡아먹었다. 목장주들에게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는 굉장히 낯설고 이상한 동물이었다.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았던 외모를 지닌 이 동물은 모든 피해의 원흉이자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1830년, 양과 소를 대규모로 방목하던 회사가 자체적으로 포상금을 걸어 사냥을 독려했고 농장을 소유한 사람들이 정부에 거세게 항의하자 정부 차원의 포상금 사냥도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무차별 학살은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가 더 이상 잡히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 종이에 연필, 2014


사라지고 나서야 소중해진 존재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는 태즈메이니아 섬에만 살았던 육식동물로 대형 유대목에 속한다. 태즈메이니아 호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등에서 꼬리 끝까지 있던 15~20개의 짙은 줄무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는 1930년, 야생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런던 동물원이 150파운드에 사들여 사육하던 한 마리가 1931년에 죽었고 호바트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어미와 새끼가 세상에 남은 마지막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였다. 한 마리는 1935년에 죽었고 마지막 한 마리는 1936년 9월 7일에 죽었다. 1만 4000년 전부터 육지와 단절된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오랜 세월 살았던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가 영국인이 섬에 들어온 지 140여 년 만에 급속히 사라진 것이다. 대량학살, 서식지 상실, 외래종인 개들과의 먹이 경쟁, 가축들로부터 전해진 새로운 질병이 멸종의 원인이었다.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를 보호하기 위해 법적 조치가 내려진 것은 안타깝게도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36년이었다.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는 멸종 후에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한 마리라도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를 찾고 있다. 그러나 갖가지 소문만 무성할 뿐 구체적인 생존 흔적이 발견된 적은 없다. 


낯설고 이상한 동물 


얼핏 보면 개를 닮았고 해부학적으로도 유사하지만 별개의 종이다. 뒤쪽으로 개방된 새끼주머니를 지녔고 다리가 짧고 꼬리는 길고 뻣뻣했다. 쫑긋한 귀와 기다란 주둥이, 강한 턱과 이빨을 지녔으며 털 색깔은 전반적으로 황갈색이었고 등에 있는 짙은 줄무늬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 낮에는 은신처에 머물다가 어두워지면 먹이 사냥에 나섰다. 주로 캥거루과의 왈라비, 숲왈라비 등을 잡아먹었다.비교적 최근에 멸종됐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냥꾼이 촬영한 기념사진이거나 동물원에서 찍힌 사진이 대부분이다. 특히 마음에 남는 사진은 사육장 안에 어미와 새끼 3마리가 함께 있는 사진이다. 그들은 엉덩이를 벽에 바짝 붙이고 쪼르르 앉아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생존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했던 생김새였을지 몰라도 내 눈에는 더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저 숲 속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다니 너무나 미안할 뿐이다.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는 1만 년 이상 살아온 땅에서 오히려 불청객이 되었다. 욕심에 눈먼 사람들은 낯설고 이상한 동물과 섬에서 공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고 불쾌한 동물이었다. 태즈메이니아 주머니늑대를 몰살시키는 대신에 울타리를 보강하거나 양치기를 더 고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Thylacine family at Beaumaris Zooin Hobart, 1909


사라진 동물을 보면 떠오르는 기억


사라진 동물을 보면 과거에 내가 지켜 주지 못했거나 방관하는 동안 상처받은 사람들이 떠오르곤 한다. 달리 소속이 없던 유년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 집단의 구성원이 되자 차별과 소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어딘가 조금 다른 아이들은 항상 약자였고 놀림과 괴롭힘을 당했다. 성장하는 동안 나는 가해자가 되기도 했고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 매일 노란 장화를 신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절뚝거리며 힘겹게 걸었고 옷차림도 생김새도 보통의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당시만 해도 어린이에게 장애인에 관한 배려를 가르치지 않았고 어른들도 편견이 담긴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곤 했다. 아이들은삼삼오오 모여서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아이의 노란 장화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상상하며 멋대로 떠들었다. 장화를 벗겨 보자는 의견도 나왔고 징그럽게 생긴 발을 봤다는 아이도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그 아이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며 지독히 가난한 데다 지능이 낮고 철도사고로 두 발의 앞부분이 짓이겨져서 이상한 형태만 남은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이 되었다. 워낙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하굣길에 그 아이를 뒤따라가 본 적이 있었다. 한동안 따라 걸으니 어떤 여자가 마중을 나와 아이를 데리고 갔다.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철저히 외톨이였고 나는 구경꾼 중 하나였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더 끔찍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얼마 전에 할머니가 병으로 죽었고 아이도 기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이었다. 학년이 바뀌기 전까지 그 아이는 끊임없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시장 근처에서 팔꿈치 아래와 하반신이 거의 없는 아저씨 한 분이 바닥에 엎드려 구걸하는 것을 보았다. 아저씨는 까맣고 두꺼운 고무 재질의 포대기로 짧은 하반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 아저씨를 보니 아이가 신었던 노란 장화가 떠올랐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너무도 복잡해 지금도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다. 몇십 년이 지났지만 노란 장화를 신고 절뚝거리며 걷던 그 아이의 뒷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다른 아이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조용하고 착한 아이였다. 나는 왜 그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을까. 잔인한 소문과 따돌림에 상처받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왜 가만히 있었을까. 내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기억 중 하나다.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방법


우리는 서로 다를 뿐이지 우월하거나 열등한 존재는 따로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잣대를 들이댄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유명인이 등장하면 두 팔 벌려 환호하고 장애인 시설이 주변에 들어올라치면 결사반대 시위에 나선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유용하지 않은 존재는 소외되고 보이지 않는 곳에 유기된다.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은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과는 단 1분도 만나지 않는다며 투철한 시간 관리로 일군 성공을 자랑스러워 했다. 언젠가는 마흔도 훌쩍 넘긴 남자로부터 자기가 찬 시계가 얼마인지 타고 다니는 차가 얼마인지 맞춰 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도 들었다. 처음에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몰라서 당황했는데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아하니 진담인 것 같았다. 소유한 물건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생명의 값어치를 따져서는 안 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아이들의 관심을 사려고 신기한 장난감이나 물건을 들고 학교에 오는 남자애들이 어느 반에나 있었다.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굉장히 잘 사는 것처럼 거짓말하는 여자애도 있었다. 물론 노란 장화를 신은 아이처럼 소외된 아이도 언제나 있었다. 어른의 세계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적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냉혹한 계산대 위에 올라야 한다. 가치 없고 유해한 동물로 여겨져 대량학살을 당했던 태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의 멸종 이야기가 과거에 사라진 동물의 운명에 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공동체 밖으로 내동댕이쳐질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가치는 저울에 달 수도 없고 바코드를 찍어 계산할 수도 없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너나없이 동등하고 귀하기에 값어치를 따져서는 안 된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참조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 톰 하트만 지음, 김옥수 옮김, 아름드리미디어(1999), p.106.

『도도의 노래』, 데이비드 쾀멘 저, 이충호 옮김, 김영사(2012)

http://www.iucnredlist.org/details/21866/0

https://en.wikipedia.org/wiki/Thylacine

http://australianmuseum.net.au/the-thylacine

http://www.naturalworlds.org/thylacin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6vqCCI1ZF7o

멸종동물, 멸종위기동물, 기후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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