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江)에 어린 우리 얼굴

김훈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by 장석규

"긴 하루가 저물었다. 그날 저녁에 임금은 나룻배로 송파 강을 건너 도성으로 향했다. 부푼 강은 물살이 빨랐다. 사공은 물살을 빗겨서 노를 저었다. 배는 더디게 나아갔다. 강폭이 넓어서 강 건너 쪽 산과 들이 어스름 속에서 끝도 없이 넓어 보였다. 저무는 물 위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뛰어올랐다. 나루가 알려준 물고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 (김훈 소설, 『남한산성』, 학고재, 2007,357쪽)


소설가 김훈이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복귀하는 심경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때는 1637년 1월 30일(양력 2월 24일)의 일입니다.

그동안 북방의 오랑캐로 업신여겼던 여진족이 힘을 길러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조선을 1차 침략한 것이 1627년 정묘호란입니다. 조선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후금이 요구하는 대로 형제의 맹약, 다시 말해 조선이 후금을 형의 나라로 한다는 조약을 맺은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조선은 명나라를 섬기는 한편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홍타이지 즉위식 배례도 안 하는 등 무시하는 듯하자 청 태종이 12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합니다. 바로 병자호란입니다.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침략한 청나라 군대의 남하 속도는 당시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빨랐습니다. 평양과 개성을 지나 12월 13일 한양 북쪽까지 들어오게 되자 당황한 인조는 12월 14일 오전에 우선 세자빈과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신하게 했습니다. 뒤따라가려고 할 때는 이미 피난길이 끊겨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외침을 당하여 무방비 상태로 우왕좌왕하다가 신하들을 대동하고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던 인조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조선왕조실록이나 그 어떤 자료에도 인조의 그 심경을 말해주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한 작가의 상상력에 의지해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남한산성』에서 김훈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행렬은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와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강은 얼어 있었다. 나루터 사공이 언 강 위를 앞서 걸으며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행렬을 인도했다. 어가행렬은 사공이 흔드는 횃불의 방향을 따라서 강을 건넜다. 눈보라 속에 주저앉은 말들은 채찍으로 때려도 일어서지 않았다." (『남한산성』, 30~31쪽)


강화도로 가려다 이미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처지에 방향을 틀어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나루터 사공이 안내하는 데로 엉금엉금 건너는 어가행렬, 가마를 타고 강을 건너 피난 가는 인조의 심정을 짐작해 봅니다. 아마 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치고 왕이 되면서부터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일들 가운데 비추는 자신의 모습, 강화도로 피신 간 세자 빈과 두 아들 일행은 안전한 건지, 어떻게 나라와 백성을 구할 것인지 하는 생각들이 마구 뒤엉켜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자신이 마치 눈보라 속에 주저앉아 일어설 줄 모르는 말들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얼어붙은 강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처럼, 인조의 내면에서도 무너져가는 나라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비명이 울리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다음 날 인조는 새벽에 다시 강화도로 가려고 길을 나섭니다. 그러나 이미 청군이 영등포까지 점령했다고 하자 남한산성으로 되돌아가서 45일을 버티게 됩니다. 인조는 청나라 군대와 싸우기보다는 주전파와 주화파의 싸움을 막연히 지켜볼 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인조는 결국 쌀 떨어지고 물 부족한 남한산성에서 나오기로 합니다. 잠실벌에 와서 날마다 항복을 종용하는 청 태종에게 굴복하기로 한 것입니다.


해가 바뀌어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청의 요구대로 곤룡포도 입지 못하고, 평복 차림으로 남한산성 서문을 나섭니다. 얼었다가 해동되는 길을 미끄러지며 흙을 잔뜩 묻히고 잠실벌 삼전도에 도착해 청 태종 앞에 엎드립니다. 청 태종은 아홉 계단 위에서 근엄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거적때기 위에 엎드린 인조가 드디어 항복의 예를 표합니다. 청나라의 요구에 따른 항복의 예는 이른바 ‘삼배구고두예(三拜九叩頭禮)’였습니다. 절을 세 번 하고 머리를 아홉 번 두드리는, 절 한 번 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 바닥을 찧는 예를 행합니다. 일국의 왕으로서, 그것도 그동안 오랑캐로 여겼던 종족의 왕에게 피눈물을 흘리며 항복하는 이 장면은 우리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조선은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기는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는 약속을 한 인조는 날이 뉘엿 해질 즈음 다시 한양 도성으로 복귀합니다. 얼어붙었던 강이 풀려서 부풀어 오른 한강을 건넙니다. 제가 이 글 맨 앞에서 이용한 부분은 기자 출신으로 사실에 기초하되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작품을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난 김훈 작가가 바로 이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1637년 1월 30일, 그날 하루는 인조에게 수십 년의 시간만큼이나 길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정지된 듯 느껴졌을 겁니다.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꿈같은 느낌에서 헤맸을 듯도 합니다. 어스름이 깔릴 즈음 한강을 건너는 인조의 마음은 말 그대로 처연하기 그지없었을 겁니다. 차가운 강바람이 뺨을 스치듯 그의 마음도 갈피를 잃어 얼어붙었고, 부풀어 오른 강물의 거친 물살 소리는 귓가를 때리며 그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부채질했을 겁니다. 강폭이 넓은 데다 얼어붙었던 강이 녹은 바람에 물살이 셀 텐데 무사히 건너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을 겁니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강 위에서 인조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 광대하고 고립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일렁이는 수면 위로 애써 시선을 던져보니, 물에 어울어울 비치는 자신의 초췌한 얼굴에서 무능함과 비통함이 뒤섞인 감정에 치를 떨지는 않았을까요? 자신이 당한 치욕에는 아랑곳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야속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저무는 물 위를 박차고 오르는 물고기 이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알았던 물고기였는데 도통 그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겁니다. 이때 인조는 42세의 한창 젊을 때였습니다. 도성으로 돌아가더라도 백성들의 얼굴을 어떻게 대할까, 이제부터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까, 무너진 자존심을 어떻게 회복시켜야 하나?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갈 생각에 물고기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병자호란으로 맺은 ‘군신 관계’는 청나라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해 한반도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이어집니다. 조선은 250년 넘도록 청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깁니다. 매년 조공을 바치고 나라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청나라의 허락을 받고 행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잠실 석촌호수 부근 삼전도에 가면 이른바 ‘청 태종 송덕비’가 서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물론 그 비가 무슨 비인지, 무슨 교훈을 말해주는지 잘 알고 있겠지요.


인조의 마음이 한강에 어렸습니다. 무시하던 이민족 앞에 굴했던 인조의 마음뿐이겠습니까? 물론 그때 흐르던 강물은 아니지만, 강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흐를 것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에 어떤 마음을 담아 보고 싶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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