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이야기 한 꼭지

by 장석규

천학매병 속의 69마리 학이 천상의 세계를 향해 날아올랐다. 불감 속에서 목탁소리가 흘러나왔다.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가 고맙다며 손을 잡았다. 백발의 스승 위창 오세창이 다가오더니, 큰 일을 이루었다며 그를 안았다. 1962년1월 26일, 나이 57세 때다.

-이충렬, 『간송 전형필』, 김영사, 2014, 396쪽

사람들은 천재 이야기보다 바보들의 행진에 더 열광합니다. 혹시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짜증이 나거나 열등감을 느껴서일까요?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바보를 바라보며 ‘내가 바보가 아니라 다행이다.’라고 생각해서일까요? 혹은 그들의 행동이 나에게 반면교사 역할을 하기 때문일까요? 이 역시 올바른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바보를 보면서 열광하는 걸까요? 예를 들어 TV를 ‘바보상자’라고 하면서도 자기마저 TV를 봐주지 않으면 마치 이 세상의 모든 TV 방송국이 망할지 모른다며 시간만 나면 TV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바보가 있기에 이 세상은 꽤 괜찮게 살아갈 용기도, 맛도 생긴다는 ‘주의’를 믿습니다. 하지만 나는 TV에 거의 고정 멤버로 등장하는 바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거나 그들을 보고 열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비교적 냉담한 편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에 ‘진짜 바보’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우리에게 엄청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샘솟습니다. 누가 우리를 열광하게 하는 ‘진짜 바보’일까요? 저는 간송 전형필 선생을 꼽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그분들이나 그 후손들의 명예에 손상을 가져오거나 결례를 범할 의도는 추호도 없음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세상은 바보들이 살맛 나게 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바보들의 덕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맨 앞에 예로 든 장면은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극적으로 표현한 전기 작가 이충렬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그의 삶은 위대하였습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은 일제 강점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우리 민족 문화의 얼과 혼을 지켜낸 위대한 선각자입니다. 그는 서울 3대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에 가업을 물려받았습니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사진을 보면, 용모가 아름답고 이목구비가 준수했습니다. 신체는 단아해서 달처럼 환하게 빛나는 귀공자 상이었습니다. 또한 휘문고보에서 야구 선수로 활약할 만큼 남성미도 넘쳤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부의 아들임에도 겸손하여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미술 선생이었던 고희동을 수시로 만나 가르침을 받으며 민족의식을 깨우쳤는가 하면, 당대 최고 감식안을 가진 오세창을 만나 서화를 배우면서 문화재 감식 방법을 전수하였습니다. 8년 연상의 거간 이순황과 우정을 나누면서 최고의 문화재를 수집하였습니다. 손수 문패를 만들어 대문에 걸었다가 이름을 새긴 글자가 너무 도드라져 보인다고 일부러 숯검정을 칠했다는 일화는 그가 좀처럼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겸허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말해줍니다.

간송 선생의 일생은 어리석은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24살 때 상속받은 10만 석 지기 재산으로 얼마든지 일신의 영화를 도모할 수 있었지만, 문화재를 되찾고 지키는 데 전념했습니다. 문화재야말로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것이요 민족의 자존심이라는 깨달음이 그를 움직인 것이지요. 때마침 문화재들이 외세에 약탈당해 해외로 불법 유출되거나 유실되고 있었습니다. 간송 선생은 문화재를 사들이는 데는 조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문화재 수집에 가진 재산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일천 원이면 서울 장안에 있는 기와집 한 채 값이던 시절에 상감청자 한 점에 이만 원, 조선백자 한 점에 14,580원을 주고 사들였습니다.

일본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던 ‘존 개스비’라는 이가 소장하고 있던 고려청자 20점을 사들이려고 공주 지역의 1만 마지기 논을 팔아 치웠습니다. 기와집 400채 값의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간송 선생을 보고 바보라 하거나 미쳤다고 놀렸습니다. 그동안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던 그의 어머니조차 그 많은 땅을 팔아서 사기그릇이나 사들이려는 게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심사정의 ‘촉잔도권’을 사들일 때는 그림이 워낙 훼손된 상태여서 문화재 가치가 없다는 주위 조언에도 불구하고 오천 원에 매입해서 육천 원을 들여 수리하였습니다. 훈민정음해례본이 안동에서 발견되었을 때 책값으로 일천 원을 요구하자 거간에게 일천 원을 주고 주인에게는 일만 원을 지불했습니다. 귀한 책은 그 가치에 합당하게 대접해야 한다고 열 배가 넘는 가격을 치른 것입니다.

간송 선생은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명예와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충북 괴산에서 도굴된 부도가 불법으로 인천항을 빠져나가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항구까지 달려가 거금을 들여 사들였습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 되기도 했지요. 또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재인 그 해례본을 지키려고 6·25 전쟁 때는 가슴에 품고 다녔으며, 잠잘 때는 베개 삼아 지켜냈습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도봉산 자락에 있는 묘에는 아름드리 장송이 의연할 뿐 그 흔한 묘비는커녕 상석도 없습니다. 생전에 별다른 공적을 세운 것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도 거창한 묘비를 세워 찬양하는 데 비하면 간송 묘소는 너무 초라합니다. 그 후손들 또한 간송 선생의 손때 묻은 문화재들을 보존하고 연구하고 알리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간송 선생은 우리 문화재를 온전히 지키는 데 빛나는 공헌을 한 분입니다.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 할 정도로 문화재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 재산을 털어서 모은 것은 문화재였으며, 그가 지킨 것은 잃어버린 문화와 역사였습니다. 민족의 자부심을 지켜내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바보 한 사람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분 덕분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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