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다시 시작이다-피스테라에서

44일 차 | 4월 8일 화요일, 맑음

by 장석규

Muxia ~ Fisterra | 30.5km, 누적 1124.3km


피스테라.
이름만으로도 가슴 뛰게 하는 곳,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땅. 바다에 닿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그곳에, 마침내 나는 서 있다. 세비야에서 시작해 1,124.3km, 44일간 걸어온 길의 마지막 여정은 파도와 바람, 햇살과 돌절벽의 환영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아침 6시 58분,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각, 알베르게를 나섰다. 즉석 빠에야와 요구르트로 간단히 속을 채우고 묵시아에서 피스테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해안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내면 깊은 곳을 두드리는 듯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지만, 그 안에 태양의 열기가 느껴졌다. 길을 걷다 뒤돌아본 순간, 떠오르는 해가 구름 사이로 황금빛 장관을 펼쳐 보였다. 오직 걷는 자만이 마주할 수 있는 시간, 찰나의 광경. 빛은 늘 찬란했고, 그만큼 무상했다.


오는 길에 만난 반가운 얼굴, 이탈리아 청년 지오반니. 길 위에서 알게 되어 다친 내 다리를 정성스레 마사지해 주던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너 덕분에 다 나았어. 고마워."
그 짧은 재회 속, 우리는 서로를 축복하며 작별했다. 그는 묵시아로, 나는 피스테라로. 우리의 길은 반대였지만, 마음은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아 걷는 길.

오후 1시 반, 피스테라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간단히 씻고 나서 등대로 향할 준비를 했다. 순례 여정을 함께하면서 다 닳아버린 양말과 망가진 선글라스를 챙겨 배낭에 넣었다. 마치 이 순례의 흔적, 이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상징하는 물건 같았다. 등대까지는 3.5km의 오르막. 세 번째 피스테라지만 여전히 숨이 차고 다리가 무겁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걷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세상의 끝.

카미노 0.000km.
표지석에 단단히 박힌 숫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더는 갈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들었다.
“이제 다시 시작해라.”


먼저 한 일은, 오랜 여정 내내 조심스레 간직해 온 작은 십자가를 돌십자가에 걸어두는 것이었다. 친구의 아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 내 마음의 무게이자 소망이 담긴 그 십자가를, 바다를 향한 돌십자가에 조용히 걸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친구 아들과 가족을 위해 아뢰었던 마음, 그리고 내가 걸으며 올렸던 모든 간구를 하나씩 되새겼다. 애절했던 마음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단 하나의 외침. “살려주세요.”

카미노에서 드린 기도는 단순했다.

고통 속엔 수식이 없었다. 절망 중엔 화려한 문장도, 신학적 논리도 없었다.

그저, "주님, 목이 마릅니다." "갈 길을 모르겠습니다." "인도해 주세요."

이 절실한 세 마디뿐이었다.


하지만 이 절실함이야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가장 온전한 기도의 본질임을 깨달았다.

주님과의 관계는 말이 아니라, 태도에 있었다. 그저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그 자세 하나가 이미 충분한 기도였다. 주님은 언제나 내 마음을 알고 계셨다. 고백하지 않아도, 눈물조차 메마른 날에도, 그분은 내 영혼의 갈증을 알고 계셨다.

피스테라의 해는 눈부셨고, 바다는 끝 간 데 없이 넓고 또 깊었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내 안의 헛된 욕망을 씻어내는 듯했다.

붉게 지는 태양을 보며 삶의 유한함과 새로운 시작을 동시에 떠올렸다.

태양이 바다 너머로 풍덩 떨어질 때, 내 안에서도 무언가 하나 사라지는 걸 느꼈다.
슬픔이었는지, 미련이었는지, 고통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제 나는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석 앞에 다시 섰다.


바다를 등지고, 육지를 향해 선 0.000km 표지석.

왜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서 있을까. 이내 깨달았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

카미노는 끝나지 않았다.
길은 늘 있다. 없다면 만들면 된다.
중요한 건, 다시 한 발 내딛을 용기와 의지다.


피스테라의 표지석에 작별을 고하며,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첫걸음이다. 하지만 이 걸음은 더 이상 예전의 걸음이 아니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 먼 길을 왜 걸어요?”
“왜 그런 고생을 돈까지 들여가며 해요?”

나는 이제 확신한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용기와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도전하고 완주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마음 깊은 평화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일상도 순례다. 삶 그 자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카미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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