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모르는 아이 같이

43일 차: 4.7. 월요일, 맑음 / 기온 9~20도

by 장석규

Olveiroa ~ Muxía 36.5km, 누적 거리 1093.8km


지금 묵시아 Muxía의 포구가 훤히 내다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다. 고요한 수면 위에 열댓 척의 요트가 발이 묶인 채 조용히 떠 있고, 어린 여자아이들 다섯이 벌써 웃통을 벗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들락날락하며 논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었을까. 그늘진 이곳은 제법 서늘한데, 저 아이들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해수욕을 즐긴다. 철이 없어서일까. 아니, 철이 없기에 가능한 맑은 웃음과 맨살의 자유가 저 아이들에겐 있다.


문득 나도 ‘철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던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에도, 자라서도, 심지어는 나이를 꽤 먹은 지금까지도. 산티아고에서 이 먼 묵시아까지, 그리고 내일 피스테라까지 다시 걸어가려는 것도 어쩌면 철 모르는 짓이라면 할 말이 없다. 가족도, 친구들도 만류했던 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껏 걸어온 1,100여 km의 길 끝에 남은 단 30여 km, 이 마지막 여정을 앞두고 있으니, 아쉬움은커녕 오히려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 있다.


생각해 본다. 이 여정은 축구 경기로 치면 연장전인가, 아니면 본 경기 외의 번외 경기인가.
그렇지 않다. 이 길은 연장도, 번외도 아닌 ‘본 경기’다. 기도에 연습이나 번외는 없다. 단 한 마디의 탄식이라도, 그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진다면 그건 진짜 기도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기도하며, 기억하며, 침묵하며.


기억이 흐려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하루였다. 불과 1년 반 전, 2023년 가을에도 나는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다. 그땐 프랑스 길과 프리미티보 길을 잇고 나서 기차로 라 코루냐를 들렀고, 다시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오늘 지나온 둠브리아에서 묵시아까지 걸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오늘 그 길을 다시 걸으며 떠올릴 수 있었던 기억은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 단편적이고 희미했다.
기억 저편에서 불러보려 해도 낯선 모습들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예컨대, 오늘 둠브리아 Dumbria에서 간식거리를 사려했지만 기대와 달리 작은 가게 하나조차 문을 닫고 있었다.

당시엔 분명히 크고 번화한 동네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의 둠브리아는 조용했고, 비어 있었다.
굶주린 채 걷던 중 정오 무렵 세난데 Senande라는 마을을 지날 때, 문어를 파는 행상을 만나 뜻밖에 호사스러운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한 접시에 13유로. 순례길 위의 한 끼로는 꽤 고급스러웠다.

걷는 도중 마을을 지나며 문득문득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들이 있다.

줄줄이 널린 빨래. 갈리시아 사람들은 정말 부지런한 모양이다.
빨래는 단순한 가사 노동이 아니다. 그 집이 얼마나 바쁘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마치 동해안 어촌에서 오징어를 말리듯, 갈리시아의 마을 사람들은 볕 좋은 날을 틈타 옷을 한껏 널어 말린다.
물론 비가 잦은 지역이니 해가 난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실용성도 작용했겠지만, 그 풍경에서 나는 성실함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네 시 무렵,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해 짐을 풀고는 곧장 산타 마리아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을 지나 언덕을 조금 더 오르면 순례의 0km 지점 표지석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가 이베리아 반도 전도를 마친 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묵시아 해안에 이르렀을 때, 성모 마리아가 배를 타고 나타나 귀국을 도왔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신자들에게 위안과 영적 의미를 안겨주며, 이곳 성당은 그러한 사명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대도시 대성당처럼 관람료를 받지 않고, 항상 문을 열어두며, 순례자들에게 세요(스탬프)를 아낌없이 찍어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지라는 상징성을 넘어, 순례자들의 ‘정신적 종착지’가 되어주는 그 자체로도 이 성당은 충분히 소중하다.

KakaoTalk_20250506_125222367_06.jpg

내일이면 이 길도 끝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기도가 끝이 없듯, 이 길도 끝난 게 아니다.
단지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걸을 뿐이다.
그것이 철 모르는 짓이라 해도 괜찮다.
철 모를 수 있기에, 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아이처럼 부르짖을 수 있으니까.


※ 묵시아 공립 알베르게 정보
묵시아의 공립 알베르게는 갈리시아의 다른 데처럼 10유로로 통일된 가격이며, 와이파이와 카드 결제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깔끔하고 위치가 좋아 순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다만 일부 카드 결제 오류나 인터넷 접속 문제는 지역에 따라 여전히 존재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의미 없는 함성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