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일 차: 4.6. 일요일, 맑음 / 기온 9~19도
Negreira ~ Olveiroa 33.4km, 누적 거리 1057.3km
06:30, 편안한 밤을 보내고 일어났다. 침낭을 정리해 가방에 넣고, 어제 마트에서 사두었던 바게트에 초리소를 얹어 요거트에 찍어 먹으니 제법 그럴듯한 아침식사가 되었다. 간단히 배를 채우고 짐을 꾸린 뒤, 07:35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오늘은 비교적 먼 거리, 33km가 넘는 구간이다. 중간에 사설 알베르게가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일정상 머물기는 어려운 곳들이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하늘이 맑게 개었다. 무덥지도 않고, 걷기에 최적인 날씨다. 갈리시아 농촌의 전형적인 마을들을 지나며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오른다. 갈지(之) 자로, 'ㄹ' 자처럼 꺾이는 길을 걷다 보면 어디가 어딘지, 다 비슷비슷한 풍경이다. 미로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맴도는 듯한 기분. 구릉 사이마다 연녹색 혹은 청록색의 목초지가 펼쳐지고, 저 멀리 보이던 집들이 어느새 내 곁을 지난다. 축사에 있던 소들이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나를 멀뚱히 바라본다. 그 선한 눈망울이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을 건드린다. 사람도 눈빛에서 그 사람의 삶이 비친다. 나 역시 눈초리가 매섭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래서일까. 소들의 맑고 온화한 눈이 괜스레 부럽다. 마을마다 축사가 붙은 집, 곁에는 건초 더미와 커다란 창고가 있고, 갈리시아의 농촌 특유의 역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냄새지만, 이 또한 이곳의 일부다.
오늘은 유난히 오르막이 힘겨웠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데도 숨이 차고, 산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떠가고, 초록 들판을 헤치며 곧게 솟은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구릉을 지키고 서 있었다. 사진에 담아도 별반 다를 것 없는 풍경. 어느 구도, 어느 각도에서도 이미 보았던 듯 익숙한 모습뿐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내 마음속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잿빛 하늘, 아니면 황달처럼 누렇게 바랜 빛 아래 갈색으로 메마른 들판. 그 한가운데 끝없이 펼쳐진 자갈길을 허리조차 펴지 못한 채 힘없이 걷는 순례자 한 사람.
어쩌면 오늘의 나는 그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으리라. 친구의 암 소식을 들은 후, 내 마음은 급격히 가라앉았고 발걸음 역시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민수기 14장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 벌을 받는 장면이 떠올랐다. 물론 나 또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문득 야속하다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묻고 싶었다. 유칼립투스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고즈넉한 숲길에서, '주여, 주여, 주여' 혼잣말처럼 터져 나온 세 마디. 오늘 여정의 최고봉인 Miradoiro de Monte Aro에 오르자 참았던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아무 의미 없는 절규가 세 번, 네 번... 울부짖음처럼 터져 나왔다. 그 소리 끝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눈으로 흘러와 따갑기만 했지만, 손수건으로 아무리 닦아내도 마음까지 씻기진 않았다.
친구는 지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것이다. 해 뜨는 장면을 찍어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듯 우리에게도 밝은 날이 오겠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치료의 광선을 친구에게 강력하게 쏟아붓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할게.”
곧 친구에게서 온 답장은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는 것은… 지나온 삶을 합리화하며 살기에 바빴다는 것. 지나온 발자국마다 후회와 부끄러움이 가득한… 그럼에도 합리화하기에 급급했던 치졸한 자아.
내가 그런 사람이란 것을 깨달을 때에, 나는 홀로 해지는 광야에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감사히 여기며 살아야지. 희망은 좋은 것이야~!!”
욕심 많은 세상 속에서 무욕의 삶을 살아온 친구였다. 매주일 교회 성가대석에서 나란히 앉아 찬양을 부르던, 속 이야기를 자연스레 털어놓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던 그런 친구였다. 그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오늘 떠오른 해가 내일도 변함없이 떠오르듯, 친구 역시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날 것이라고. 친구야, 아무쪼록 힘내자. 지금은 모든 게 야속해 보여도, 결국 믿을 분은 하나님 한 분뿐. 우리 여생도 복된 삶 되도록, 힘 다해 기도하며 살아가자.
※ 갈리시아 지역의 사설 알베르게는 대체로 15~18유로이며, 대부분 바르나 식당을 함께 운영한다. 와이파이나 주방도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은의 길’ 구간의 공립 알베르게는 5~12유로까지 천차만별이었지만, 갈리시아의 공립 알베르게는 10유로로 통일된 듯하다. 시설도 최근에 대대적으로 개보수한 흔적이 뚜렷하다. 카드 결제 시스템과 와이파이도 갖추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카드는 알베르게에서만 작동하지 않았다. 와이파이 역시 연결은 되었지만 인터넷 접속이 되지 않았다. 결국 현금으로 숙박비를 내고, 와이파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