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나도 축지법을 쓸 줄 아네?

by 장석규

프랑스 길 2일 차/9월 9일(토), 쾌청하다가 한 차례 비

론세스바예스 ~ 트리니다드 데 아레 / 28km, 누적 거리 54km


'축지법'을 썼다니,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내가 축지법을 쓸 만한 능력은 없을뿐더러, 순례길에서는 어떤 '변칙'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융통성 없는 사람이었기에 더욱 놀랍다.

사실 축지법을 쓴 것은 내 본의가 아니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할 때부터 고민했다. 수비리(Zubiri)라는 작은 도시까지만 갈까, 아니면 5.8km를 더 걸어 라라소아냐에서 쉴까. 수비리는 21.5km 거리로 적당하고 알베르게 여건도 좋아 대부분의 순례자가 이곳에서 머문다. 나 역시 웬만하면 수비리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해 3km쯤 걸었을 때, 1923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종종 머물며 작품을 썼다는 부르게테(Burguete) 마을을 지났다. 은근한 내리막길 주변에서는 소나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숲길이 많아 아늑하고 쾌적했다. 전날 피레네산맥을 힘들게 넘은 것에 대한 보상과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해발 810m의 에로 봉(Alto de Erro)을 지나면서부터 가파른 내리막과 돌길이 이어졌다. 비가 올 때마다 흙이 깊게 파여 나간 길 위에는 톱날처럼 날카로운 편마암 돌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미끄러져 발목을 다치기 십상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을 옮기다 보니 내리막인데도 이마에 땀이 흐르고 옷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전날 고생한 보답은 주지만, 그렇다고 긴장의 끈을 놓지는 말라'는 길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힘들게 내리막길을 마무리하니 수비리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왔다. 그런데 내 발은 수비리로 향하지 않고 라라소아냐로 가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라라소아냐는 10년 전에 머물렀던 마을이다. 당시 공립 알베르게에 갔다가 내 앞에서 순번이 끊겨 급히 사설 펜션을 찾아 비싼 돈을 주고 잤던 경험이 생생하다. 그때의 보상 심리였을까. 사람들 많고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을 잘 아는 발이 알아서 내딛는 걸음을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수비리부터는 공장지대 옆으로 난 길이어서 시끄럽고 삭막했다. 더구나 오후가 되면서 햇볕이 따가웠다. 달궈진 아스팔트 오르막길은 쉽게 지치게 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디론가 일시에 숨어버린 듯했다. 조금 더 걸으니 숲길이 나오고, 이내 '라라소아냐 2.2km'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오른발 뒤꿈치 쪽에 물집이 잡히려는 듯 열이 나기 시작했다. 숲길을 지나 라라소아냐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넜다. 아르가 강(Río Arga)이라는 개천에 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10년 전, 다리를 건너자마자 저 개울 물에 발을 담갔던 기억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공립 알베르게에서 바로 내 앞에서 순번이 끊겼던 아쉬움도 함께.

마을에 들어서는데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알베르게 진입로는 비닐 테이프로 막혀 있고 마을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알베르게 앞 광장에 당도하니 커다란 천막 아래 백여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개의치 않고 알베르게 문을 두드렸지만, 어떤 사람이 나와 오늘은 알베르게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그러면 순례자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구글 지도 앱을 열어 검색해 보니 마을에 사설 알베르게가 하나 있었다. 겨우 찾아갔지만, 남자 오스피탈레로는 알베르게가 다 찼다고 했다.

마침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던 대만 여성 세 명과 남성 한 명이 택시를 불렀으니 팜플로나로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자고 했는데, 조금 뒤에 도착한 택시 기사가 5명은 태울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덩그러니 혼자 남아 다시 고민에 빠졌다. 발뒤꿈치에 물집이 잡히려는 증상이 나타나서 다음 마을까지 10km를 더 걷는 건 무리였다. 이십여 분 앉아서 쉬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남자 순례자 한 분이 들어왔다. 알베르게에 빈자리가 없다는 말을 들은 그 역시 난감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서 온 장 탕가이(Jean Tanguy)라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순례자였다.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자신과 함께 택시를 타고 다음 알베르게까지 가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10.6km를 택시로 건너뛰어, 팜플로나를 4.6km 앞둔 트리니다드 데 아레(Trinidad de Arre)에 있는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단숨에 10km 이상을 건너뛴 덕분에 몸도 덜 피곤했고 발에 물집 잡히는 것도 예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축지법'의 편안함에 재미를 붙여 쉽게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알베르게에서 쉬는 사이에 한 차례 비가 쏟아져 널어놓은 빨래가 다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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