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에너지

by 장석규

프랑스 길 4일 차 / 9월 11일(월), 비 온 뒤 갬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테야 / 22km, 104.5km


새벽 여섯 시에 알베르게를 나서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걷기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부디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긴 골목길 한가운데 마침 문을 연 바르(bar)가 눈에 띄었다. 새벽 여섯 시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문을 열다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알베르게를 나서기 전, 식당 자판기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으려고 5유로짜리 지폐를 넣었는데 잔돈만 나오고 샌드위치는 나오지 않았다. 기계를 두어 번 두드려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을 기계가 먹었나 보다' 생각하며 배낭을 메고 나왔는데, 꼭두새벽에 문을 연 바르를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바르에 들어가 크루아상 한 개와 카페 콘 레체 한 잔을 주문했다. 3유로, 우리 돈으로 4,400원꼴이다. 빵과 커피 값이 한국에 비해 무척 저렴한 편이라 부담 없이 먹고 마실 수 있어 좋았다. 부드러운 크루아상 속살을 뜯어먹으며 구수한 카페 콘 레체 한 모금을 마시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골목길을 지나 '왕비의 다리'(Puente la Reina)를 건넜지만,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다리의 전체적인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서쪽 구릉지대 너머에서는 마치 레이저 쇼가 벌어지는 듯 번개가 번쩍번쩍했다.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빗방울마저 굵어졌다. '땀에 젖으나 비에 젖으나 어차피 젖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배낭 커버만 씌우고 판초 우의는 입지 않았다. 한 시간 반쯤 지났을까, 간혹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들릴 뿐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 마을 마녜루(Mañeru)를 지나 벌판 길에 접어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구름 속에서도 동쪽 하늘에서는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며 요란스럽던 천둥과 번개도 어둠과 함께 물러갔다. '그래, 가끔은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어. 카미노를 새벽 일찍 출발하는 묘미가 바로 이런 거지.'

씨라우끼(Cirauqui), 로르카(Lorca) 마을을 지나 에스테야(Estella)에 이르는 길은 빗물이 고인 곳이 많아 질퍽거리고 걷기 불편했다.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다른 데서 재미를 찾는 것이다. 길가에 무수히 떨어진 돌 사과, 호두, 들포도, 그리고 무화과! 아, 그중에서도 무화과는 맛이 기막히게 좋았다. 노란빛으로 물들어 탐스럽게 벌어진 무화과, 그처럼 물기 많고 달콤한 무화과는 좀처럼 먹기 힘들 것 같다. '한두 개 더 따 먹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아쉬움 때문에 다시 의욕을 북돋아 열정을 발휘하는 것 아니던가. 무화과 한 개 더 따 먹지 못한 아쉬움은 뒤로 남겨두기로 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며 하나님이 주신 만나처럼, 배부르게 먹지는 못했을 그 만나처럼, 나도 그 맛을 본 것만으로 대만족이다.

오늘은 내 생애 가장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는 행운을 누렸다. 에스테야 직전 마을인 비야투에르타(Villatuerta) 서쪽 하늘에 왼쪽 뿌리와 오른쪽 뿌리가 선명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산이 많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엄청난 크기의 무지개였다. 몇 시간 동안 요란했던 번개와 천둥, 그리고 비를 이겨낸 나에게, 그리고 그 길을 걷고 있던 순례자들에게 하늘이 내린 선물 같았다.


12시 10분, 에스테야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했다. 2층 침대를 배정해 주었다. 보통은 65세 이상 나이 든 사람에게 1층 침대를 주는데, 바꿔 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묵기로 했다. 8유로, 참 착한 가격이다. 걸을 때 오른쪽 장딴지에 왔던 근육통이 아직 덜 풀려 쉬려고 침대로 올라가는데, 다리가 아파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10년 전에도 이 알베르게에 묵었는데, 리모델링을 해서 시설이 깨끗하고 샤워실이나 화장실도 여유로운 편이었다.


한 시간가량 낮잠을 자고 시내로 나왔다. 에스테야는 인구 15,000여 명의 도시다. 알베르게에서 200미터 거리에 있는 산 페드로 광장 벤치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너편에는 박물관으로 쓰이는 '나바르 왕들의 궁전'이 옛 영화와 몰락을 이야기하는 듯했고, 뒤쪽 언덕에 있는 산 페드로 데 라 루아 성당은 근엄한 표정으로 세상을 향해 믿음을 잃지 말라고 주문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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