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모드로 걷기

by 장석규

프랑스 길 5일 차 / 9월 12일(화), 맑음

에스테야 ~ 로스 아르코스 / 22.5km, 누적 거리 127km


새벽 여섯 시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양쪽 다리는 근육통이 덜 풀려 뻐근했고, 발은 내딛기가 괴로웠다. 좁은 골목길을 마치 오리걸음 같은 모양새로 걸었다.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마주친 N번 도로의 교차로와 아예기(Ayegui)로 이어지는 오르막 경사길은 포장도로여서 걷기가 팍팍하게 느껴졌다.

이라체(Irache) 수도원 근처에 있는 '와인의 샘'(Fuente de Vino) 앞에는 여러 명의 순례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와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두 개의 꼭지 가운데 오른쪽에서만 실낱같이 물이 흐르고 왼쪽은 잠잠했다. 행운이 있는 사람만이 와인을 받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 '행운'을 포기하고 그냥 지나쳤다. 때로는 괜한 기대를 품고 다가갔다 실망하기보다는,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곧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오른쪽 길로 가면 큰 도로를 따라가게 되고, 왼쪽 길로 가면 2km 정도를 더 걸어야 하지만 숲길이 이어진다. 몇몇 순례자는 안내 팻말 앞에서 망설이다 오른쪽 길로 향했다. 아직 새벽 어스름이라 숲길을 택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테다. 하지만 나는 주저 없이 왼쪽 숲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호젓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군데군데 나무에 가려 더 어두운 곳에서는 핸드폰 플래시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걸었다. 소나무 숲과 참나무 숲이 번갈아 나타났다. 새벽에 맡는 숲의 향기는 언제나 더 진한 법이다. 이 길로 접어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마주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확신이 들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곤 한다.


긴 숲길을 빠져나오자 동쪽 여명이 길을 밝히며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광활한 구릉과 대지, 멀리에는 길게 늘어선 칸타브리아 산맥이 보였다. 루킨(Luquin) 마을을 앞둔 길가에는 복숭아가 지천으로 떨어져 있었다. '다시 가난한 순례자가 되기로 하자.' 나뒹구는 복숭아들 가운데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세 개를 주워 옷에 쓱쓱 문질러 한 입 베어 물었다. 잘 익지 않았는데도 단맛이 무척 좋아 단숨에 먹어치웠다.


오늘따라 배낭이 자꾸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마다 양손으로 배낭을 떠받치듯이 하고 걸어야 했다. 양발에 잡힌 물집이 더 악화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뒤꿈치로 딛지 못하고 앞발로만 디디니 여전히 어기적거리는 '오리걸음'을 해야 했다. 심하진 않았으나 오른쪽 장딴지 근육통 때문에 다리를 약간씩 절면서 걸었다. 날씨도 좋고 오르막길도 거의 없었는데 22.5km를 걷는 데 여섯 시간 가까이 걸렸다. 걸음이 무척 느려진 셈이다. 하지만 순례자에게는 빠른 걸음보다 느린 걸음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비로소 '순례자 모드'로 완전히 전환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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