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동냥 충전

by 장석규

프랑스 길 11일 차 / 9월 18일(월), 맑음

부르고스 ~ 라베 데 라스 칼사다 / 12.8km, 누적 거리 290.7km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알베르게에서 쉬는 동안 밤새도록 신경 썼던 것은 핸드폰 충전이었다. 부르고스로 오는 길에 비를 맞으면서 충전기에 빗물이 스며든 탓인지, 핸드폰이 충전되지 않았다. 충전 케이블을 핸드폰에 연결하면 즉시 '충전기를 분리하라'는 경고문이 뜨는 것이 아닌가.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이상 없이 충전해서 나왔는데, 비를 맞아 빗물이 새 들어간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배터리는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좀 지나면 물기가 말라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밤새도록 충전이 되지 않았다. 결국 부르고스 시내에서 새로운 충전기를 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핸드폰이 작동되지 않으니 내 사고마저 혼란스러워지고 아예 마비되는 것을 실감했다. 답답한 마음에 혹시 충전기를 빌려줄 순례자가 있을까 싶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자신도 여분의 충전기가 없거나, 사용 중이거나, 혹은 고장 날까 염려해서일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순간, 내가 마치 길 위에서 돈이나 먹을 것을 구걸하는 사람처럼 핸드폰 충전을 '동냥'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미노를 걷는 동안 최대한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고 싶었는데, 핸드폰이 없으면 지도 앱을 보거나 알베르게 정보를 얻는 것조차 힘든 현실이 나를 붙잡았다. 결국 나는 현대 사회의 문명 속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순례자인 셈이었다.

다행히 아침에 부르고스에서 하루 더 묵겠다는 한국인 부부를 만나 20%의 배터리를 보충할 수 있었다. 짧게나마 충전 '동냥'을 한 셈이다. 이후 한 순례자가 자신의 충전기를 빌려주었고, 꽂아보니 충전 표시등이 들어왔다. 휴!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또 다른 순례자의 도움으로 빈 멀티탭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핸드폰 충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순례길에서는 생존과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 작은 도움의 손길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아침 8시에 알베르게 앞에 있는 바르에서 보카디요 한 조각과 코르타도로 아침 식사를 했다. 바르가 비좁아 더 앉아 있기가 미안해 바깥으로 나오니 긴소매 옷을 입었는데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비가 온 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 탓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난 데서 오는 심리적 불안이 겹쳤기 때문이리라.

검색을 해보니 충전기를 파는 곳 중 가장 빨리 문을 여는 데가 오전 10시였다.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했다. 할 일 없이 시내를 배회하다 로렌소 엘 레알(Lorenzo el Real) 성당에 들어갔다. 마침 미사가 진행 중이어서 뒷자리에 앉아 묵상 기도를 올리니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간이 되어 미리 알아둔 ○○폰 매장에 가서 충전기를 샀다. 충전기와 케이블을 합해 39.9유로(약 5만 8천 원)라는 예상치 못한 지출이 발생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했다는 안도감에 천 근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시 배낭을 둘러메었다. 실수로 저질러진 일(충전기에 빗물이 들어간 것)은 잊기로 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늘은 부르고스를 벗어나 짧은 구간만 걷기로 했다. 어제 38km 넘게 걸었던 후유증으로 발이 아팠기 때문이다.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서 부르고스로 오는 동안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질척이는 길까지 겹쳐 몸이 말이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22~25km는 거뜬히 걸었을 텐데, 오늘은 12.8km를 걷는 데도 세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짧게 끊어가기로 결정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부르고스를 관통하는 아를란손 강(Río Arlanson)을 따라 난 산책길을 걷기 시작했다. 월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활기가 넘쳤다. 청소원들이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고, 학생과 직장인들이 각자 갈 길을 바삐 오갔다. 큰 도로에 줄지어 선 가로수들과 강가를 덮은 숲 덕분에 건너편 부르고스 대성당은 마치 숲 속에 서 있는 듯 보였다.

워낙 느지막하게 출발했으니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오늘은 쉬는 날로 여기고 컨디션을 회복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될 메세타를 걷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한 시간가량 걸어 부르고스 시내를 완전히 벗어나니 본격적인 메세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르다호스(Tardajos)라는 마을을 지나 오후 1시 반경 라베 데 라스 칼사다(Rabé de las Calzadas)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가 없어 사설 호스텔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었다. 여자 순례객 몇 명만 있어 조용했다. 오스피탈레로가 방으로 안내하더니 여섯 개 침대 가운데 마음에 드는 침대를 쓰라고 했다. 숙박비 12유로에 저녁 식사 10유로, 아침 식사 3유로 등 모두 25유로를 지불했다.

알베르게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물론 새로 산 충전기로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이었다. 충전이 잘 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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