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타에서 맛본 황홀경을 추억하며

by 장석규

프랑스 길 12일 차 / 9월 19일(화), 맑음

라베 데 라스 칼사다 ~ 카스트로헤리스 / 27.2km, 누적 거리 317.9km


프랑스 길에서 맞이한 열두 번째 아침, 라베 데 라스 칼사다를 나선 길은 새벽안개로 자욱했다. 그 신비로운 안개를 뚫고 도착한 온타나스 마을은 마치 메세타 한가운데 숨겨진 오아시스 같았다. 드넓고 광활한 대지 속으로 움푹 파여 아늑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르에서 초콜릿 빵 한 개와 코르타도 한 잔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갈색으로 물든 대지와 대조적으로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물길, 그리고 그 곁의 푸르른 숲이 어우러져 진정한 오아시스의 정취를 더했다. 그 아름다운 풍경 때문인지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역시 메세타의 너른 품이 나와 잘 맞는가 보다.


광야와 다름없는 황량하고 끝없는 메세타 벌판 위, 저 멀리 홀로 우뚝 선 나무 한 그루, 나는 그때 맛본 황홀경을 잊을 수 없다. 십 년 전, 처음 카미노를 걸으며 가장 깊은 울림과 은혜를 경험했던 곳이 바로 이 메세타였다. 그 길 위에서 마주했던 절대고독감. 외로움에 몸부림치기보다 오히려 그 고독을 즐겼던 그때의 체험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듯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늘은 27.2km를 걸었다. 최근 컨디션으로 볼 때 딱 적당한 거리였다. 사실 발뒤꿈치에 잡힌 물집이 자꾸 신경 쓰였다. 부르고스 진입 전 이틀 동안 36km, 38km를 연달아 걸었던 것이 무리였나 보다. 터진 물집 안에 또 물집이 잡혀 바늘로 조심스레 터뜨리고 소독과 연고를 바르는 등 정성껏 돌봐야 했다. 가끔은 누가 시키거나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20km 미만으로 걸으면 요령을 피우는 것 같다', '30km 이상 걸었다고 누가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닌데 왜?'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하지만 어제는 완급조절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12km만 걸었다. 덕분에 오늘 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먼 길을 탈 없이 완주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나아갈 줄 알고, 멈출 줄 알며, 필요한 때에 기꺼이 쉴 줄 아는 지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오후 12시 반에 문을 여는 알베르게 시간에 맞춰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카스트로헤리스는 메세타 지역에서는 비교적 큰 마을로, 스페인의 레콩키스타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세 순례길의 주요 기착지로 알려진 유서 깊은 곳이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깨끗이 세탁한 옷가지를 햇살 좋은 곳에 널어 말렸다. 그러고는 그늘진 야외 탁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맑은 하늘 아래 공기가 더없이 산뜻하게 느껴졌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흰 구름들은 제 모습을 한껏 뽐내다가도 이내 다른 모양으로 변신하는 '변신의 귀재' 같았다. 카미노에 오기 전 친구가 선물해 준 드립 커피를 우려 마셨다. 그윽한 커피 향이 친구의 따뜻한 우정처럼 느껴져 마음이 훈훈해졌다.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언제나 좋지만, 이날은 몸도 마음도, 그리고 영혼까지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길을 걷는 동안 몇몇 소중한 사람들에게 영상 편지를 남겼다. 교회 찬양대 지휘자에게는 나의 '카미노 송'인 '주기도송'으로 대신 안부를 전했다. 또 이십 년 넘게 희소 난치병과 싸우면서도 갑작스러운 아들의 죽음이라는 큰 아픔을 이겨내고 있는 딸에게, 그리고 체구는 작지만 그 누구보다 강하고 깊은 영혼을 지닌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알베르게에 와이파이가 없어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영상을 업로드했다. 단 3분짜리 영상 하나를 올리는 데 십 분 이상이 걸릴 정도로 '무진장'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어 기뻤다.

알베르게에서 쉬는 동안, 영국 런던에서 온 샬럿을 또다시 만났다. 세 번째 만남이라 더욱 반가웠다. 여전히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불러주기에 '천재 소녀'라고 칭찬해 주었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혼자 순례 중이라고 했다. 엄마는 포도주 사업 때문에 부르고스에서 비행기 편으로 먼저 귀국했다고 한다. 함께 일기를 쓰다가 샬럿이 자기 일기장에 내 이름을 한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시 보아도 16살처럼 맑고 명랑한, 스물여섯 살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처녀였다. 이렇게 길 위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세 번이나 이어지니, 스치는 인연이라기보다는 점점 더 깊은 반가움과 정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카미노 길은 걷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과의 짧지만 강렬한 교류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가는 곳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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