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길 10일 차 / 9월 17일(일), 흐리고 비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 부르고스 / 38.2km, 누적 거리 277.9km
어젯밤 9시부터 오늘 아침 7시까지, 무려 열 시간을 중간에 깨는 일 없이 푹 잤다. 덕분에 몸이 가벼웠다. 느지막이 일어나니 한방에서 함께 묵은 순례자들이 거의 다 떠나고 나를 포함해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이왕 늦게 일어난 김에 배낭을 완전히 뒤집어엎어 정리했다. 어디선가 흘린 줄 알았던 양말 한 켤레가 배낭 제일 구석진 곳에 처박혀 있었다. 양말을 잃어버린 줄 알고 산토 도밍고에서 새로 살까 말까 망설였었는데…. 개인은 물론 사회, 국가 차원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전반적인 점검과 재정비, 재구성이 필요하며, 때로는 혁신이나 개혁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건 하나하나를 제자리에 정리해서 다시 배낭을 꾸리고 알베르게를 나선 시간은 아침 여덟 시 정각이었다. 그동안 새벽 다섯 시나 여섯 시쯤 출발하던 것에 비하면 무척 늦은 출발이다. 어제 34.1km를 걸은 것에 대한 보상이라 여기며 느긋하게 출발한 것이다. 원래 계획은 18.1km 지점인 아타푸에르카(Atapuerca)까지만 가고 다음 날 부르고스에 들어가자는, 나름의 완급 조절 차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첫걸음부터 불안했다. 양쪽 발뒤꿈치부터 내딛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제 무리하게 많이 걸은 후유증이었다. 긴 언덕길을 오르니 모처럼 숲길이 이어졌다. 길은 넓고 쾌적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파쇄석이 빗물에 드러나 발을 자극하고, 둥근돌들은 볼록볼록 튀어나와 아픈 발을 더 괴롭혔다. 아무래도 물집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 '오리 뒤뚱거리듯' 우스꽝스러운 보행이 되고 말았다.
긴 숲을 지나 오르테가(Ortega)에 도착했다. 바르에 들어가 코르타도 한 잔과 작은 보카디요(bocadillo) 하나를 주문했다. 합해서 2.5유로, 커피 맛도 일품인 데다가 치즈와 햄을 넣은 보카디요까지, 아침 식사로 만족스러웠다.
다시 배낭을 메고 출발했지만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는 여전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쉬기로 했던 아타푸에르카 마을이 나올 테니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아타푸에르카는 유럽에서 발견된 초기 인류 유적지(호모 안테세소르)로 유명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정말이지, 무슨 일이든 자기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이 세상 이치인 모양이다. 아타푸에르카에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갔는데, 순례객들로 꽉 차서 기웃거리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괜히 어설픈 기분이 들어서 그냥 돌아 나왔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계획을 바꿔 부르고스를 향해 더 걷는 수밖에. 오르막길은 왜 이다지도 길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슬슬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해골처럼 하얀 돌들이 박혀 있는 오르막길 한가운데 피어난 하루살이 연분홍 꽃들(Merendera montana, 크로커스 종류)이 순례자들의 발길에 밟힐까 봐 바르르 떨고 있는 듯했다.
오늘은 주일이었다.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온종일 길 위에서 몸과 씨름한 결과는 '완패'였다. 긴 숲길을 지나는데 누군가 돌들을 모아 만든 십자가 형상 앞에서 잠시 묵상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주일 예배를 대신할 수는 없을 터,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마을마다 있는 교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라도 묵상할 수 있는 카미노라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비가 점점 세차 졌다. 옷은 이미 다 젖었고 빗물이 신발까지 스며들었다.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요란해졌다. 비를 흠뻑 맞고서야 부르고스(Burgos)에 당도했으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무리한 셈이었다. '완급 조절'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패배의 쓴잔을 마신 기분으로, 엘 시드(El Cid, 스페인 독립 전쟁 영웅 로드리고 디아스 비바르)의 고향 부르고스 대성당 인근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았다.
쉬는 동안 거듭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나는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카미노를 걷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