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웅덩이에 내려앉은 별빛

by 장석규

프랑스 길 15일 차 / 9월 22일(금), 맑음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 32.9km, 누적 거리 411.9km


알베르게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나섰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200미터쯤 걸어갔을까. 뭔가 허전했다. 배낭은 메었지만 두 손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아차, 스틱!' 서두를 이유가 없었는데 잠시 마음이 앞섰나 보다. 아픈 두 다리에 힘을 보태주는 스틱을 두고 갈 수는 없는 일, 알베르게로 뛰다시피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스피탈레로가 웃으며 스틱을 내주면서 "부엔 카미노(Buen Camino!)" 하고 외쳐주었다.

마을의 마지막 보안등을 지나는 데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곧바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어느 때보다 더 투명해 보였다.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다. 어제 내린 비로 길에 움푹 파여 물이 고인 곳마다 별들이 포근히 내려앉아 있었다. 흙탕물 속에서도 별들은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 뜬 별, 그리고 물웅덩이에 내려앉은 별빛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안내 책자에는 큰길을 따라간다고 되어 있었는데, 지나가는 차 한 대도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어둠의 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지도 앱을 열어보니 카미노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돌아나갈 수밖에….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것도 용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1.5km를 잘못된 길로 들어갔으니 왕복 3km를 또 헛걸음한 셈이었다. 하지만 '너 스스로 헛걸음도 헛일이 아니라고 했듯이, 그만큼 물웅덩이에 비친 별빛을 더 오래 감상했잖아' 하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너무 잦으면 안 될 것이다. 지나친 방심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하게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했다.


모라티노스(Moratinos) 마을의 바르에 들러 코르타도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영상 편지 몇 편을 업로드했다. 3분짜리 영상을 올리는 데 무려 1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잘 쉬고 다시 출발하니 발걸음은 가벼운 편이었다.

애초에는 사아군(Sahagun)에서 쉴 계획이었다. 사아군은 로마 시대에 건립된 마을이자 중세 시대 권력의 중심지였다. 볼 만한 역사적 건축물이 많은 곳이라 쉬면서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었다. 12시 반쯤, 10년 전에 묵었던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Cluny)에 도착했다. 그때 기억으로는 흙으로 지어져 무너졌던 건물을 새로 보수해 알베르게로 사용하는, 인상 깊은 곳이었다.

알베르게에 잠깐 기웃대다가 시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바르에 들러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배낭을 다시 멨다. 발을 내딛는데 통증이 다시 밀려들었다. 설상가상 오른쪽 무릎은 마비된 느낌이었다. '휴식이 너무 짧았던 건가? 어설픈 휴식이 오히려 컨디션 조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이런 상태로는 다음 마을까지 10여 km를 더 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내친걸음이니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한때 스페인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던 수도원의 아치, 아르코 데 산 베니토(Arco de San Benito)가 옛 영화를 대변하는 듯 굳건히 서 있었다. 그 외형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다.

15-1.사아군 산 베니토 수도원과 아치.jpg

한참을 걷는데 다리도 아프고 발뒤꿈치에 다시 물집이 잡히는 듯 발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느릿느릿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데, 건장해 보이는 순례자 세 사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흔한 ‘올라’나 ‘부엔 카미노’ 인사말도 건네지 않았다. 배낭은 동키 서비스로 보낸 것인지, 작은 가방만 메고 날아가듯 멀어져 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괜히 얄밉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저들이 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무런 인사말도 건네지 않고 지나갔을 뿐인데 왜 그들에게 무시당한 기분이 드는 걸까. 보통 다리를 절거나 힘들어하는 사람이 보이면 응원하는 뜻으로 '부엔 카미노'를 힘차게 외쳐주게 마련인데…. 비록 내 육신은 고통스러워도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는데, 저들은 건장한 몸으로 손바닥만 한 가방만 메고 가니 대조적인 모습에 심술이 난 것이다.

육신이 괴로우면 마음 조절에 약해지기 쉽고,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삐치는 심리가 남에게 투사되어 나타나기 십상이다. 너무 대조적인 모습에 심술을 부리는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순례길에서조차 이렇게 못된 성정을 드러내는 나야말로 '물웅덩이에 비친 별빛이 아름답다'라고 감상하던 나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나의 진면목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오후 세 시가 훨씬 지나서야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Bercianos del Real Camino의 한 사설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았다. 현대화한 시설에 모두 1인용 침대, 14유로를 냈다. 할 일을 마치고 쉬는데 파리가 너무 성가시게 한다. 얼굴에 달라붙고, 손에 날아와 앉는 등 일기 쓰는 걸 방해한다. 가는 곳마다 파리가 많은 게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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