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길 16일 차 / 9월 23일(토), 맑음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 26.3km, 누적 거리 438.2km
밤에 잠을 자는데 발에서 열이 나고 욱신거려 잠이 깼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복도로 나와 발을 살펴봤다. 붙이고 다니던 헝겊 반창고를 떼어내니 물집 안에 물집, 그 안에 또 물집, 3중으로 물집이 잡혀 있었다. 마치 적에게 겹겹이 포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장 조치해야 했다. 물집을 터뜨리고 알코올 소독을 하고서야 비로소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 혹시 물집이 한 부위에 자꾸 잡히는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2중으로 된 깔창 중 하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 의심이 갔다. 결국 아래위 깔창을 바꾸어 끼웠다. '오늘은 좀 걸을 만하려나?' 짐을 챙겨 알베르게를 나선 시간은 6시 45분,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26km 지점인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라는 도시까지만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고대 로마 시대에 건설된 대도시 레온 진입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늦잠을 잔 편인데도 몸은 무거웠고 물집 후유증 때문에 발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해서 뒤꿈치부터 디뎌 보았다. 통증으로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다행인 것은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별로 없는, 대체로 쉬운 구간을 걷는다는 것이었다.
대도시에 가까워지다 보니 큰 도로 옆으로 카미노가 이어졌고, 버즘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십 년 전에는 칼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manillos)를 거쳐 만시야까지, 17km 이상 마을이나 물을 보충할 곳도, 그늘도 없는 길을 땡볕 아래 걸었었다. 이번 순례에서는 다른 길을 택했는데, 중간중간 쉴 만한 마을이 몇 개 있어서 요기하고 물도 보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그리 큰 나무들은 아니었지만 중간중간 그늘이 있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나무를 심은 지 십여 년밖에 안 돼 보였다. 카미노를 완전히 덮을 정도의 큰 그늘을 만드는 나무가 되려면 최소한 십 년은 더 지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작은 그늘이라도 그늘이니, 그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늘이 고맙다. '내가 만드는 그늘의 크기, 넓이는 얼마나 될까.' 마을 어귀마다 수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 팽나무처럼 큰 그늘을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단 한 사람 지친 이가 찾아와 쉴 수 있는 그늘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발이 아프고 무릎은 마비되는 듯한 통증 때문에 걷는 속도는 더뎠다. 모처럼 만난 한국인 순례자도 별다른 대화 없이 그냥 지나갔다. 열두 시가 지나 렐리에고스(Reliegos)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미니 마켓에서 빵 한 개와 음료수를 사서 길가 벤치에 앉아 마시고 있는데, 반대 방향에서 한 순례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내 옆에 오더니 들고 있던 병맥주를 추켜올리며 '살룻(Salud!)'을 외쳤다. 나 또한 손에 있던 캔맥주를 들어 화답했다. 포르투갈인으로 안토니오라고 했다. 나이는 46살, 리스본(Lisboa)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거쳐 팜플로나까지 가는 중이라고 했다. 무척 건강해 보였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허그 인사를 나눈 뒤 '부엔 카미노(Buen Camino!)'를 외치며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픈 발을 이끌며 묵묵히 걷는 중이었다. 길바닥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 있었다. 돌을 밟을 때마다 '앗', '아이고!' 하는 소리가 속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런 나에게 돌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그건 내가 지른 소리가 아니야. 네 속에서 나온 소리라고. 그러니 내 탓하지 마. 네 발에 내가 밟힌 거라고. 그렇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어. 내가 너를 아프게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네가 나를 밟아 놓고 네가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억울해하지 마.'
그렇다. 나는 조금만 힘들어도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기보다는 다른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울 태세를 갖춘다. 그게 몸에 배어 관성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야만 속이 풀리는 것 같고….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사건들이 다 그런 경우 아닌가. 자기가 잘못을 저질러 놓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공격을 일삼아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 또한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는 뜻으로 돌들이 내게 말을 걸었던가 보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의 하르딘 알베르게(Jardín Albergue)라는 사설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숙박비는 16유로였다. 아픈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작은 나무의 그늘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