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은 또 다른 반전을 부른다

by 장석규

프리미티보 길 1일 차 / 9월 26일(화), 맑음

오비에도 ~ 그라도 / 26.5km, 누적 거리 483.5km


반전은 또 다른 반전을 불러오는 것일까. 오비에도 시내를 벗어나는 데만 무려 한 시간이 걸렸다. 인구 20만 명이 훨씬 넘는 대도시이니만큼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복잡한 시내를 직각으로 꺾고 또 꺾고, 잘 보이지 않는 길바닥의 가리비 표시나 노란 화살표를 찾아 헤매기 일쑤였다. 겨우 시내를 벗어나자 이번에는 꼬불꼬불한 길에 오르막 내리막이 거듭됐다. 산 중턱에 있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었다. 오르막길에서는 숨이 차서 걸음이 느려지고, 내리막길에서는 아픈 무릎에 충격이 가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또 느려졌다.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요 며칠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새벽 추위를 겪은지라 긴팔 셔츠에 바람막이 옷까지 껴입은 것이 오판이었다.


지나는 곳마다 소똥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농촌에서만 맡을 수 있는 정겨운 향기다. 앞뒤로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프랑스 길이나 계속 걸을 걸, 굳이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보겠다고 이곳으로 온 것이 잘못된 선택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레온에서 오비에도로 오는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독일 여자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프리미티보 길을 걸으려고 오비에도로 간다고 하니, 자기도 걸어봤다며 '업다운이 심한 길'이라고 몸짓으로 표현했던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순례 초반 중의 초반이니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더 힘들까,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데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포장도로를 따라가야 하니 위험하기도 하고 발의 피로도 가중되었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것, 새로운 길을 간다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길바닥에는 여물어 떨어진 호두들이 즐비했다. 그중에 몇 개 주워서 까먹으니 고소한 맛이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호두를 까먹으며 힘든 것을 잊었다. 사과나무 주변에도 떨어진 사과들이 지천이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한 터라 사과 하나 주워 땀에 밴 옷에 쓱쓱 문질러 한 입 베어 물었다. 단맛도 괜찮고 과즙도 풍부했다. 메세타 지역을 지날 때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는데, 이곳에 오니 심심치 않게 먹을 것이 주어졌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며 하늘이 내린 만나를 그날그날의 양식으로 삼은 것처럼, 사과나 호두로 배도 채우고 힘든 것도 잊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커피 한 잔 생각이 간절했는데도 중간에 마실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무려 여섯 시간이나 걷고서야 비로소 바르를 만날 수 있었다. 팔라딘(Paladín)의 한 바르에서 마신 카페 콘 레체는 2.1유로로 다른 곳보다는 조금 비쌌지만, 풍성한 거품과 맛이 한국의 카페라테와 비슷해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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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걸었을까. 날론 강(Río Nalón)을 따라 쾌적한 숲길이 이어졌다. 물가로 가서 배낭을 벗어던졌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을 차가운 강물에 담갔다. 옆에 아들이라도 있었다면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도시에 살 때는 낚시를 좋아해서 실컷 해보려고 시골로 이사하고서는 정작 낚시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다던 친구 얼굴도 떠올랐다. 잠깐 사이에 다섯 시간 넘도록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는 동안 쌓인 피로가 다 풀린 듯했다. 계속 강가로 이어지는 길은 숲길인 데다 폭신폭신한 흙길이었다. 이런 편안한 길이 계속되지는 않겠지만 일시적인 호사도 호사임에 틀림없다.


페냐플로르(Peñaflor)라는 마을을 지나 2~3km가량 걸으니 오늘 목표 지점인 그라도(Grado)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알프스의 한 마을을 빼닮았다. 구글로 검색해 보니 인구 1만 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였다. 오후 두 시가 채 안 되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세 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고 했다. 문 앞에 두 번째로 배낭을 벗어놓고 나무 그늘로 들어가 일기를 쓰다가 시간이 되어 알베르게 앞으로 올라갔다. 웬걸, 앞에서 기다리던 순례자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체크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두 번째로 도착했는데, 나중에 온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 좋은 자리를 차지한 듯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참 의리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 와서까지 의리를 따질 필요는 없다. 그래 봐야 나만 속상할 뿐이다. 서둘러 이런 감정을 떨쳐내는 것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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