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티보 길 8일 차 / 10월 3일(화), 흐림
오 카다보 ~ 루고 / 30.6km, 666.8km
마침내 루고(Lugo)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앞에 있는 바르에 앉아 일기장을 폈다. 카페 콘 레체(1.4유로)를 주문했을 뿐인데, 쿠키와 후라이드 치킨 한 조각, 감자칩 한 움큼을 더 주었다. 스페인에 와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 만족감이 커졌고, 덩달아 커피 맛도 배가되는 듯했다.
오늘은 애초 루고까지 올 생각이 아니었다. 어제 묵은 오 카다보에서는 30km가 넘는 먼 거리인 데다 일정상 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 중간에 하루 쉬었다가 루고에 들어오려고 했었다. 아침에 다른 때보다 늑장을 부린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내친김에 루고까지 도착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오늘 걸어온 길은 그동안 지나온 길에 비하면 무척 쉬운 편이었다. 오르내림 경사가 많지 않은 데다 '카미노 프리미티보(Camino Primitivo)'답게 원시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숲길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 줬다. 길 양쪽에는 언제 쌓았을지 모를 만큼 이끼 푹신하게 낀 돌담이 늘어서 있었고, 그런 길이 이어지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사진도 찍어보고 동영상으로도 담아보지만, 길의 멋과 분위기를 온전히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연이어 통과하는 작은 마을들, 갈리시아(Galicia) 지역은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편이다. 마을 경계도 불분명하고 마을 이름을 알려주는 표시조차 없는 곳이 많아 어디쯤 걷고 있는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나는 마을마다 소나 말을 키우고 있어서 길마다 소똥이 질펀했고 냄새가 진동했다.
루고를 6~7km가량 남겨두고 배낭에서 빵을 꺼내 점심 삼아 먹는데. '내가 어느새 걷는 기계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치 걷는 기계가 자동으로 걸음을 걷듯이 내 발이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십 년 전에도 걷기 시작한 지 3주가 지난 어느 날, 무려 열한 시간 동안 43km를 걸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내 의지보다는 발이 자동으로 나가는 듯한 경험을 했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부작용들, 이를테면 발 물집, 요통, 어깨 결림 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3주가 지난 지금 오른쪽 무릎 통증도 심하지 않고 양쪽 발에 이중 삼중으로 잡혔던 물집도 깨끗이 나았다. 한동안 나를 괴롭히던 근육통도 사라졌다. 3주가 지나면서 걷기에 최적화되어, 말 그대로 '걷는 기계'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마 다른 순례자들도 마찬가지겠지? 인간의 환경 적응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니까.
길바닥에 밤과 호두가 지천으로 떨어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도 순례자들도 잘 줍지 않았다. 나는 밤과 호두를 한 움큼씩 주워서 호주머니를 두둑이 채워 넣었다. '순례자와 거지는 결국 한 끗 차이가 아닌가.'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과와 호두, 포도, 무화과, 복숭아, 밤, 복분자 같은 열매들은 배고픈 순례자의 허기를 채워주기도 한다.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떨어진 열매를 보면 주워 먹는다. 출출한 배도 채우고 갈증을 풀기에 그만이다. 다른 순례자들은 몰라도 나는 늘 그랬다. 하늘이 내려준 '만나'를 받아먹듯이 했다. 도시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먹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이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 굳이 먹으려면 쓰레기통을 뒤져야 한다. 나는 순례길에서 이런저런 열매들을 주워 먹기는 해도 '거지'는 아니다.
나는 순례자인가, 여행자인가, 아니면 방랑자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지만 셋 다 아닌 것 같다. 나는 돈독한 신앙심만으로 이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독교 신자이기는 해도 종교나 신앙 차원에서만 이 길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여행자인가? 그렇지도 않다. 나는 카미노를 걸으면서 내 목구멍에 걸린 가시를 뽑아내거나 가슴에 뭉친 그 무엇인가를 풀어내고 싶어 이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처 없이 걷는 것은 아니니 더더욱 방랑자는 아니다.
세 시가 가까워질 무렵 루고에 도착해 공립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았다. 숙박비는 10유로였다. 여기도 텅 비어 있어 한적해서 좋았다. 좀 쉬고 나서 도시 산책에 나섰다. 인구 10만 명 정도인 루고는 로마 제국 시대에 건설된 '루고 성'으로 유명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성은 둘레 길이 2,266미터 그대로 보존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루고 시내를 둘러보았다. 시청과 대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점과 식당, 바르들이 자리 잡아 관광객들로 흥청대고 있었다. 이어서 루고 산타 마리아 대성당을 찾았다. 입장료는 4유로였다. 잠시 기도와 묵상을 한 뒤 천천히 성당 안을 둘러보았다. 로마네스크, 바로크,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양식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 일기는 루고 대성당 앞, 루고 성 둘레길에서 마무리한다. 흐린 날 늦은 오후, 점점 추워지고 바람까지 분다. 어서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야겠다. 걷는 기계가 되었든, 순례자든, 여행자든, 방랑자든. 지금은 그저 따뜻한 곳에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