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조종하는 이가 누굴까

by 장석규

프리미티보 길 9일 차 / 10월 4일(수), 오전 짙은 안개

루고 ~ 페레이라 / 27.1km, 693.9km


오늘은 짙은 안개 자욱한 길을 유영하듯 걸었다. 아침 7시 35분에 출발해 30여 분 만에 루고 시내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가 어쩌다 숲길이 나타날 뿐이었다. 천천히, 마치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갔다. 시정 거리는 대략 15~20미터, 보이는 것은 가까이 서 있는 나무들뿐이었다.

허리는 마냥 구부정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숨마저 멈춘 듯 고요한데, 가끔 굉음을 내며 쌩쌩 달려가는 차들이 안갯속 고요와 적막에 침잠해 들어가던 나를 흔들어 깨우곤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멈출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 인생 또한 안갯속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 뚜벅뚜벅 앞을 향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안개가 걷히리라. 안개는 어차피 일시적일 뿐이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던 안개는 언젠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해가 나오는 순간 안개는 걷히고 아름답고 멋진 세상이 나타난다. 캄캄한 세상에서도 포기하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안개 자욱한 길을 네 시간이나 걸었다. 등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내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감춰져 있던 비밀이 드러나듯 세상이 제 모습을 보였다. 파란 하늘 아래 목초지마다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드문드문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를 끼고 앉은 푸른 숲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람이 그려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명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역시 내 안에 누군가가 들어앉아 나를 조종하는 듯했다. 몸 상태로 치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왼발 발가락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아파오고 발등 전체로 통증이 확산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손으로 주무르다가 안티푸라민 마사지를 해 주어도 크게 효과가 없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멈춰지질 않았다. 마치 내 의지에 따라 걷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과연 나를 이끄는 이는 누구일까. 오후 들어 두세 시간을 더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땡볕을 그대로 쬐면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10월 초라고 하지만 스페인 특유의 햇볕은 여전히 따갑기 그지없다. 순례자들이 오후가 되기 전, 늦어도 한두 시 이전에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어제저녁에도, 그리고 오늘 아침 출발할 때만 해도 '20km 지점 이내에서 머물러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마침 그럴 만한 마을에 알베르게가 있는 것으로 검색도 되었다. 일정도 여유 있으니 쉬엄쉬엄 가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다가도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곤 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조종하는 이가 누굴까?'


어느새 페레이라(Fereira)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아 나베(A Nave)라는 사설 알베르게에 들었다. (숙박비 16유로, 아침 식사 6유로) 몸은 피곤하고 발은 아팠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오늘도 걷고 또 걸었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를 조종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올까. 안개처럼 걷히지 않는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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