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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s Apr 24. 2024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너 잘났다.

이혼 조정을 위해 찾은 가정법원 조정실 앞 의자에서 그 사람과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었다.

뭐지...


뭘까 한참을 생각했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내가 그토록 나보다 늘 우선이던 극진히 생각하고 아끼던 그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별로였다.

눈은 볼 수 없었지만 그 언밸런스한 옷차림과 별 볼 일 없는 몸매, 옷테, 그 구두... 다 이상했다. 아니 역겨웠다.


나는 지금 그 남자와 양육권과 재산분할로 싸워야 한다.

개새끼가 들개처럼 아이 백일 때 중학교 동창이랑 바람피우고 이혼당하는 주제에 양육비를 깎고 내 집에 봇짐 하나 매고 들어와서

대접받고 아들 얻어나가면서 쓴 돈을 다 달래네... 오케이. 양육비를 깎고 푼돈을 못 받을세라 가압류를 건다.

정말 돈에는 모든 감정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렇게 천박할 줄은 몰랐다.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다. 태어나자마자 아빠를 모르고, 지금 기억할지 모르겠다.


단순히 사랑만 하는 것으로는, 다른 생명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 밀리의 서재


아이를 위한 선택은 뭐가 있을까?

나는 감정적이고 우유부단하며 사람을 좋아한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게 허용되는 분위기에서 자랐고 남편은 이성적이고 서늘한 분위기에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어머니, 공부 잘하는 형 밑에서 결핍이 많은 채 자랐다. 어느 부모가 아이를 더 잘 맡아줄 수 있을까 매일 만 번의 고민을 한다. 또 한다.

생각은 흐려지고 자식을 품고 같이 어두운 시도를 하는 어미의 마음도 이해가 될 지경에 다다른다.


사람은 겪어 보지 않은 일에 충고하기 쉽다. 내 주변에는 나를 사랑하는 아껴주는 사람들이 온통 나를 걱정한다.

아이를 위한 선택이 아빠에게 양육권을 넘겨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는 아이를 보내주라는 의미로 들린다.

아이를 키우는 데 최소 돈이 얼마가 들고, 자신 있냐는 둥 차라리 자리 잡고 돈 모아서 아이에게 한 밑천 해주는 엄마가 되라는 둥

다들 아이 안 보내본 사람들의 충고다. 걸러내는 데도 한계가 있다. 울음도 한계치에 다다르자 두통이 시작되고 잠은 멈춘 지 좀 됐다.


나는 아이에게 무얼 해줄 수 있고, 저 쪽은 부모의 자격이 있을까.

아이는 누구랑 살고 싶을까? 나는 어떤 부모가 되어줄 수 있지. 두렵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살아있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이는 태어날 때 자기의 그릇을 갖고 태어나지, 아이는 내가 오롯이 만들어내는 게 아닐 거다.

남편은 다시 바람이 날 거고 작은 소중함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 어머니는 나르시시스트라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아무리 좋은 동네에서 아이를 키워도 아이는 메마르게 냉정하게 결핍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그게 아이와 나에게

삶의 원동력이 되어 더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응원해 주는 동력이 되어주기를 희망한다. 아이는 무해한 눈빛과 해맑은 미소로 나를 찾아온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윙크를 해주고 토닥거려 준다. 아이를 위한 선택이 나를 위한 선택이 되겠구나 그려진다.

이혼을 결심하며 마흔에 나는 누구보다 나를 위한 삶을 살기로 다짐을 해도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더 먼저 생각하기란 어렵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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