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 s May 27. 2024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로부터-

아이가 첫걸음마를 떼었다.

아장아장 오리발처럼 걷기 시작하고 앜바라고 소리를 내며 공중에 소리를 터트린다.

아이는 아빠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걸까?

아빠는 아이가 진심으로 보고 싶긴 한 걸까?

남편은 아이 백일 때 충동을 참지 못하고 중학교 동창과 바람을 피웠다. 단순히 사소한 일탈이었을 거라 짐작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좋은 아빠이리라 장담하지 못한다.


확실한 건 나는 그 사람을 남편으로 인정하거나 아이 아빠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확실했고,

나는 그런 사람을 그 자리에 두려고 열심히 다정히 대하며 열심히 사는 게 아니었다. 만난 지 6개월 만의 결혼, 우리는 둘 다 마흔에 문턱에 있었다.

좋은 가정을 만들자고 서두른 탓일까? 생물학적 잉태에 대한 두려움의 기저에서 발생한 번식욕이었을까? 사랑보다 책임감이 이끌었던 결혼이었다.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하고도 당당하고 그 집안은 무엇 때문에 가식으로 위장하고 되려 나를 책망하려 하지? 왜 손으로 하늘을 가릴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 자식과 가정을 뒤로할까? 이유는 모른다. 다만 내가 경솔했고, 그가 경솔했고 우매했고, 내가 성급했다. 우리 아이가 이제 나의 아이가 되고, 그의 아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갓 태어난 아이가 불쌍했다. 태어나자마자 아빠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점이 미안했다. 자고 있어도 보고 싶고 작은 숨을 내쉬어도 귀한 내 아이에게 그런 생각 없는 행동을 한 데 대해 완벽하게 분노했고, 그만큼 좌절했다.

같은 인간으로서 실망했고, 눈앞에 놓인 싱글맘과 한부모 가정의 아이의 앞날이 두려웠다.

나의 교육관과 급한 본성이 아이에게 미칠까 걱정이 되었다. 확실한 건 아이 아빠에게 가서 자란다면 바람이 유전될 가능성과 별다른 노력 없이 삶에 큰 도전하지 않으며 변화를 두려워하며 클 것은 분명 하단 결론에 내가 이 작고 귀한 아이를 오롯이 떠맡기로 용기 내었다.


나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또한 너의 팔자고, 아이를 같이 키워주는 부모가 있다는 것도 너의 복이라고. 누구보다 나의 아이를 예뻐해 주시고 나를 애틋하게 사랑하시고 가엽게 보고 계신 게 느껴진다. 어느 순간 나와 아이는 나의 부모님에게 말 못 할 아픔이 되어버렸다.

나의 아가는 내 품에서 그리고 가족들 품에서 아낌없이 사랑받고 귀하게 자랄 거고, 나는 이 작은 아이에게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건 실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순간들이 많다.

이 작고 소중한 존재를 위해서 못 할 일이 있을까? 무엇이든 되어주고 싶고, 해주고 싶지만 아이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욱 선명해지는데

그것들 또한 아이를 위한 일이다.


첫째, 내가 먼저 행복해야 아이도 부모님도 

내 주변이 행복해진다.


둘째, 내 인생이 건강하고 즐거워야 아이도

아이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셋째, 아이는 건강히 태어나면서 나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고 나에게 와준 귀한 손님이다.


나의 부모님이 간절히 기도해 나를 지켜주고 지탱해주고 있으시고, 나를 둘러싼 작고 큰 존재들이 나와 같이 힘들어해 주고 응원해 준다.


새벽에 기분 좋은 따뜻한 공기가 불듯이 좋은 예감도 함께 드는 건 분명 축복일 것이다.

나쁜 예감도 좋은 예감도 틀리지 않는다. 이혼을 통해 나는 분명히 배우고 있다. 나보다 그 어떤 존재도 나보다 더 위하지 말고, 나를 위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들러리로 살 생각 하지도 말아라. 자식도 마찬가지일 테니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주자.


또 한 가지는 나는 특별한 운명의 남다른 존재가 아니다. 어느 때에는 특별하겠지만 나는 특별하지 않다. 모두에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다.


파도가 계속 불어와 거칠고 단단한 바위가 자갈돌이 되어 가는 게 인생이라 엄마는 말했지만, 이번에 내가 느낀 건 파도가 인생일 수 있겠다.

휘몰아친다 해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순간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며 단순하게 겸손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걸.


종교가 없어도 좋다.

다만 양심이 없는 사람은 피하자.

그리고 나는 아이를 낳고 꽤 단호해졌다.

아이를 지키려는 본성이 이렇게나 강하구나.

그 어떤 존재로부터도 아이를 지킬 준비가 되어있다. 나르시시스트 시어머니를 직면하고도 처음과 다르게 점점 무섭지가 않다. 괴물을 상대하려니 나도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데도

내 아이를 지키려면 필요하면 그 여자를 상대로 싸우다 죽일 수도 있겠다는 끔찍한 용기가 나온다.


이런 내가 무섭고 대견하다. 나는 아이의 엄마이다. 위험한 존재고 불완전한 존재이면서 연약한 사람이고, 외롭기도 한 여자이다.


나는 내 인생을 좀 더 멀리서 보게 되었고,

작은 미물의 가엾은 나로서 스스로를 포옹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내 모든 삶의 기준이 바뀌고 온 집중을 다해 목표를 세우고 있다.

삶은 단순해지고 목표는 선명해진다.

잘못된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삶은 계속되고

더 기묘한 일들도 생길 수 있다.



신이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나는 말했다.

 "할 수 없어요. 두려워요."

신이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할 수 없어요. 추락할 거예요."

신이 다시 말했다. "절벽 끝으로 오라."


그래서 나는 갔고, 신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나는 날아올랐다.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중에서-


그렇게 나는 날고 있는 중일 거다. 그렇게 날 수밖에 없는 일로 이끌린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힘들지 않으면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데

힘든 일이 생길 때 희한하리만큼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는 거 내 기분 탓일까. 나는 모태신앙의 매주 한 번도 성당을 가지 않는 불량한 신자이다.

하느님이 어디에나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보냈다는 말이 무엇일지 정확히 모르지만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온 신경이 아이에게 가는 하나의 짐승이고, 모든 촉수가 아이에게 가는 게 자연스럽다.


사랑은 유일한 희망이고 열쇠임에는 분명한 거 같다. 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내 마음이 기특하듯이 나에게 일어난, 그리고 또 일어날 일들에 사랑을 마음에 품고 용기를 내보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어려울 때는 스스로 행복해지라는 티베트 속담이 있다. 우리는 희망하고, 절망하고, 희망한다. 이것이 우리의 날갯짓이다. 물에 얼굴을 박고 넘어져 있다면 당신이 할 일은 얼른 일어나는 일이다. 물속에서 산소를 찾거나, 아가미를 만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