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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댁 고양이 Jun 09. 2024

인연 = ‘사람답게’ 만드는 사람.

이상형과 같이 살기 위한 조건.

한적한 일요일 오후. 차영(30)은 한강 공원에 나왔다. 어제 비가 오고 갠 뒤라 적당히 촉촉한 공기가 좋다. 남편 심희(32)는 마실 걸 사 오겠다며 편의점에 갔다.


공원 전경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앉은 차영은 사람들을 구경한다. 유모차에 강아지를 태운 할머니가 지나가는가 하면, 커플 티에 신발, 모자까지 맞춰 쓴 요란한 남녀도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요란한 듯 조용하게 싸우고 있는 30대 커플이 눈길을 끈다. 차영은 수능 영어 모의고사 이후 꺼낸 적 없던 청력과 두뇌를 총동원해 무슨 일인지 분석한다.


당연하게도 둘은 커플이고 사랑싸움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여자 曰 “자기 변했어. 어떻게 그런 걸 까먹을 수가 있어?”

남자 曰 “사람이 왜 그래? 까먹을 수도 있는거지. 뭘 그런 거로 그래. 이왕 즐겁게 왔으니 좋게 좋게 보내자.”

여자 曰 “그런 거? 그게 그런 거야? 어떻게 그래. 자기 완전 속 편하게 산다. 나만 중요하게 생각했네.”

남자 曰 “이번엔 좀 그냥 넘어가면 안 돼? 매번 이러는 거 나도 힘들다.”

여자 曰 “내가 힘들어? 힘든데 왜 만나? 그냥 집에 있지.”

남자 曰 “아니 또 왜 말을 그렇게 해? 꼭 그렇게 말해야 해?”


차영은 생각한다. ‘아, 중생들. 이 화창한 날 한강공원까지 나와서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안타깝도다. 안타까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영은 엿듣기를 멈출 생각이 없다. 커플은 이견 조율이 되지 않았는지 결국 남자가 여자를 5m쯤 떨어져서 따라가는 모습으로 갈등을 마무리 지었다.




결국 뭐 때문에 싸웠는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걸 뒤로한 채 차영은 심희를 기다린다. 아직 안 오는 걸 보니 큰일까지 치르고 오나 보다. 유독 장이 약한 심희다.


손잡고 가는 커플을 보며 차영은 심희와 사귀기로 했을 때를 떠올렸다.


4년 전 심희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형이란 건 없다고 생각했어. 만에 하나 이상형을 만나도 서로 좋아하고 연인이 될 순 없다고 믿었지.”


“직장 생활에 찌든 점도 있지만 이상형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누가 이상형을 물어봤을 때 확고하게 얘기하기도 모호하고. 또 취향은 늘 변할 수 있으니까. 난 사람은 변덕스러울 수 있지만 관계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특히 차영이 너랑은 더 그렇다고 생각했어. 네가 변할 순 있겠지만 그때도 여전히 잘 지냈으면 좋겠고.”


“네가 변할 때 나도 따라 변하면 계속 좋은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해.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지.”


“나는 너랑 그렇게 지내고 싶어.”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거창하게 하는지. 그날의 심희는 귀여웠지만, 차영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꿉꿉하다.


심희가 멀리서 싱글벙글 웃으며 온다. 아침햇살과 조청유과 그리고 맥콜을 들고. 물론 조청유과는 차영이 취향이다.


차영은 심희를 보며 ‘많이 사람 됐네’ 하고 흐믓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면 심희가 분명 꼬리를 물 것이다. ‘사돈 남 말하네’ 하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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