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사람(6)
나는 늘 말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주둥이만 살았다”는 경우.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쏙 빼닮은 친가쪽 내력이라고 하셨다. 나도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 하고 싶어 했다. 초등학생 때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던 것 같은데 덕분에 많이 싸웠고 많이 맞았다. 어머니도 늘 “생각하고 말해”라고 하셨다. 맥락은 기억 나지 않지만 그 당부만은 머리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생각할 거리는 많았다. 좀 사는 집이라면 있는 금성출판사의 과학학습만화 전집이 우리집에도 있었다. 8평 남짓한 아파트에 네 식구가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교육에는 늘 진심이셨다. 덕분에 하루가 멀다하고 과학 전집을 읽었고 공룡이나 동물, 유명한 발명가 등 많은 사람을 알게 됐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기억한다. 난 정확히 반대의 경우다. 조금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을 말하고 싶어 늘 몸이 근질거렸다. 발표하는 걸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 무렵이 아닐까 싶다. 발표 숙제가 나오면 공을 들였고 발표했다.
하지만 뭐든 적당히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싫어하기 마련이고 그 적당히를 알기까지 꽤나 오래 걸렸다. 중학생 때는 그걸 몰랐고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나는 위축됐고, 고등학교를 거쳐 군에 입대해서도 위축된 건 마찬가지였다.
혹독한 군 생활을 거치며 말하고 싶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침묵은 금이었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니까. 회의 시간에는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다”는 말만 했고, 뭐 먹겠냐는 물음에는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되물었다. 무색무취가 되고 싶었다.
코끼리는 하늘을 날 수 없다. 날개도 없거니와 앞발을 파닥거리면 지진이 나겠지. 무엇보다도 이상해 보일 거다. ‘왜 저러고 살지’ 하는 느낌.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말은 조절할 수 있어도 표정이나 뉘앙스는 숨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걸 귀신같이 알아봤고, 난 점점 무리에서 배제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무리에서 이탈했다. 군대식 표현으로는 ‘미친척’이다. 회식 때마다 누군가가 죽었고, 가족사가 생겼다. 안다. 나도 그들도 내가 미친척 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처음엔 욕을 했다. 그게 군대식 사랑표현이라는 걸 깨달은 건 제대하고 한참 지나서다.
직업군인에게 제대 하겠다는 말은 ‘잘 있어라 나는 간다’와 비슷한 의미다. 특히 의무복무가 아닌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누가 ‘너 제대하려고 그러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욕도 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고 내 병과에 받을 수 있는 보직 중 가장 편한 곳에서 나는 제대를 선택했다. 어머니도 고참들도 다 미쳤다고 했지만 내 귀엔 들리지 않았다.
난 말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아니 말해야만 하는 그런 일. 그게 요가 강사였다. 동작이나 원리, 호흡을 알려주는 게 좋았고, 꽤나 잘 가르쳐줬다. 표정이 굳은 사람들이 있다면 ‘노려보면 무섭다’고 농담도 던졌다.
강의실에선 요가 강사의 말이 곧 법이었고, 요가 외에 할 말도 없지만 누군가가 내 말에 따라 움직이는 걸 보는 건 꽤 중독적이다. 군대에서도 병사들이 내 말에 따랐지만 강제성이 있는 것과 아닌 것에서 오는 차이는 극명했다.
지금은 요가 강사를 포기했지만 그때 나는 분명 살아있음을 느꼈다. 확실히 사람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이를 먹어가면서 말수가 줄어든 부분이 있는데 한편으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말수가 많은 어른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불쾌함 때문이다.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이 더 낫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많으면 실수도 비례해 늘어난다. 또 기자 생활을 하면서는 말 할 일보다 들을 일이 더 많았다.
그렇게 듣는 게 일상이 됐고 현재에 이르렀다. 일상에선 가급적 말을 줄이려고 한다. 하지만 말하고 싶어하는 태생은 어디 가지 않더라. 해서 이렇게 글을 쓴다. 누군가가 박수를 쳐주길 기다리며.
기록이 길이 된다면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