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지분 4할은 간달프에게(8)

by 장수댁 고양이

영화 <반지의 제왕(2002)>의 간달프가 발록을 막아 세우던 장면은 지금 봐도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모리아광산의 외나무다리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그는 말했다.


You shall not pass!(여긴 못 지나간다!)


그리고 10살의 난 간달프가 되기로 했다.


간달프가 되고 싶다는 걸 자각한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뭐가 되고 싶은지’를 적어오라는 숙제였는데 간달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썼다. 반지원정대를 꾸리고, 사우론과 맞설 인간들을 하나로 모으고, 마지막에는 프로도까지 구하는 그 역할이 좋았다. 방향을 제시하고 적재적소에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그런 역할이.


이후로 ‘간달프 같은 조력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간달프는 불사(不死)에 마법까지 쓰지만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즈음부터 책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심리학 입문서와 자기 개발서를. 뭘 알아야 도와주든 말든 할게 아닌가.


불안과 우울, 사랑과 이해,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고 노력해야 하는지 등. 지식은 갈수록 늘어났다. 실천에 옮겼다면 인생이 한결 수월했으리라. 머리만 굵어졌고 누가 물어보면 신나서 얘기했다. 얘기를 듣는 진지한 표정이 좋았고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속으로 좋아 죽었다.


밑천은 20살 부사관 생활을 시작하면서 드러났다. 계급은 눈을 멀게 했고 병사들이 나보다 형이라는 걸 잊게 했다. 신나게 했던 불필요한 설교가 군생활을 계속 꼬아갔다. 24살을 넘어가면서는 좀 자제했지만 사람은 쉽게 안 바뀐다. 그냥 뒀으면 됐을 문제를 계속 들쑤셨다.


‘문제 시 하지 않으면 괜찮은 문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그런 게 보이기 시작한다. 답이 없다기보단 그냥 두는 게 최선인 경우다. 냉장고 아래에 만 원짜리가 있다 해도 굳이 냉장고를 옮기거나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만약 오만 원짜리였다면 치웠겠지만 만원 정도는 나중에 해결해도 되니까.


매일 술을 마시는 고참의 건강이 걱정돼도, 인형 뽑기에 미쳐 수십만 원씩 썼다고 자랑하는 후배도 그냥 두면 된다. 그게 결핍 때문에 그런 것인지, 미래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그들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분명 문제라면 문제지만 출퇴근 잘하고 업무에 빵꾸 안 내면 딱히 신경 쓸 바는 아니다.


그게 참 어려웠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들을 그냥 지나치는 게. 정의감 때문도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도 아니다.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명확해졌다. 그럴 때가 아니면 얘기할 일이 없으니까. 그게 싫었다. 말하고 싶었고, 그 기회를 애타게 기다렸다.


문제의 원인을 알아도 해결되지 않는 때가 있다. 원인이 ‘나’일 때다. 사람 쉽게 안 바뀐다는 말은 나에게도 통하는 말이었고, 같은 실수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서른이 넘으면 좀 어른스러워질 만도 한데 고치는 게 참 어렵더라.


다행이라면 와이프를 만났다는 점이다. 꿈을 잊어버린 35살 직장인은 5년이 지난 지금 디자이너로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의 간달프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아이패드를, 맥북을 쥐어 주며 날마다 잔소리했고, 그녀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지금은 와이프도 안다. 디자이너 지분의 4할은 간달프에게 줘야 한다는 걸.


서른둘이 된 간달프는 여전히 프로도를 찾고 있다. 프로도가 여러 명이었으면 좋겠지만 기대는 안 한다.


기록이 길이 된다면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