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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인터넷 소설을 좋아했다. 내가 초등학생일 무렵에는 ‘늑대의 유혹(2002)’ ‘내 사랑 싸가지(2001)’ 같은. 아빠와 나는 깐족거리길 좋아했고 엄마가 소설을 볼 때면 ‘짱나 소설’을 본다고 놀렸다. 한 번은 아빠가 그런 말을 했다. “제목이 뭐야, 싸가지? 이거 되게 싸가지 없는 소설이구만.” 당시 아빠는 마흔 하나, 엄마는 서른여덟, 나는 열 살이었다.
엄마가 소설을 볼 때면 유독 괴롭혔다. 심심하지 않아도 보챘다. 엄마는 말했다. “이것만 보고 할게” 뭘 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순간을 넘어가기 위한 말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엄마가 모니터에 푹 빠져있는 동안 나는 그 주변을 굴러다녔다. 데굴데굴.
아빠는 엄마가 목석같다고 했다. 꽃을 사다 줘도 “주머니에 돈이 썩어나지” 하곤 했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엄마도 안다. 외가 쪽 내력이다. 실리를 추구한 대신 낭만을 잃어버린. 그래도 목석보다는 ‘뚝딱거린다’ 정도에서 봐줬으면 한다. 꽃을 화병에 꽂아뒀으니까.
엄마가 낭만을 배운 건 내가 스물다섯 때다. 책에서 배운 대로 엄마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런 일에 이유는 없어도 된다. 엄마는 이유가 더 필요했지만 곧 얌전해졌다. 엄마를 볼 때마다 그렇게 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좋다니까 그냥 했다.
엄마가 자기 얘기를 한 건 내가 안아주는 게 익숙해질 때쯤이다. 엄마는 자기 얘기를 잘하지 않는다. 주유소에서 10시간씩 주 6일을 일하고 연년생 아들을 키운 얘기는 특히. 엄마는 ‘답도 없는 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갔고 돌이킬 수 없는 얘기를 해서 뭐 하냐’고.
65년생인 엄마는 스물여섯에 결혼해 일곱에 형을, 여덟에 나를 낳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건 최근이다.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엄마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자기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난 엄마를 안아줬다. 평소보다 조금 길게.
요즘 엄마는 형이 구독해 준 넷플릭스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다. 이젠 환갑을 넘었지만 엄마는 여전히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한다.
얼마 전 집에 갔을 때 엄마는 만화를 보고 있었다. ‘약사의 혼잣말(2023)’인데 재밌다고.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재밌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기록이 길이 된다면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