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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롤러코스터가 재밌다며 2번을 탔다. 아니, 3번이었나. 나는 아빠를 따라 같이 탔고, 형과 엄마는 벤치에 앉아 쳐다만 봤다. 20년 전 에버랜드에서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엄마랑 간만에 통화했다. 별일은 없다. 별일 없으니 됐단다. 아빠는 어떠냐고 물었다. 며칠 전부터 ‘울증’이 왔다고 했다. 해서 뻗어있다고. 나는 “다행이네” 했고, 엄마는 웃으며 “너무 그러지 마”하고 넘겼다.
울증. 정확히는 우울증. 그 표현도 애매한 게 아빠는 조증과 울증이 번갈아 가며 온다. 한 달 혹은 그보다 짧게 그런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다. 어느 날은 한없이 다정했고, 어느 날은 분노를 주체 못 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기분파라면 누구나 다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간장 떡볶이를 만들던 사람이 몽둥이를 든 도깨비로 변했다고 조울증을 연상할 수 있겠는가.
떡볶이를 만드는 아빠는 세상 가정적이었다. 나는 식탁에 앉아 있고, 아빠는 카투사 운전병 때 얘기하며 떡을 조린다. 설탕과 간장과 고춧가루를 1대 1대 1로 섞어 만들면 된다는 설명과 함께. 5분 만에 만든 떡볶이는 꽤 괜찮았고, 엄마가 한 것보다 나았다.
몽둥이를 들었을 때도 있었다. 아빠는 분노를 주체 못 했고 난 맞았다. 엄마가 말려야 했을 만큼. 질풍노도를 겪고 있던 터라 정신이 없었다. 아빠는 아무 데나 둔다며 내 가방을 던졌고, 나도 거울치료 좀 당해보라며 아빠 가방을 던졌다. 가방엔 캠코더가 들어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상 참작할 수 있다.
아빠에게 조증과 울증이 번갈아 온다는 걸 깨달은 건 스무 살이 넘어서다. 당시엔 충주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엄마가 그러더라. 아빠 조울증이라고. 단순한 변덕이 아니란다. 그게 뭔지 잘 몰랐기에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제대하고 아빠랑 둘이 살았던 기간이 있다. 엄마는 혼자 살아보고 싶다며 춘천으로 떠났을 때다. 아빠가 울증이기도 했다. 아빠는 울증일 때 가만히 있는다. 침대에서 일주일이나 그 이상을. 집에 계속 같이 있으니 알겠더라.
그래도 밥은 먹는다. 편식이 심하지만 죽겠다 싶으면 조용히 나와 라면이라도 끓여 먹는다. 그리곤 다시 침대에서 시간을 보낸다. 세상이 망했으면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게 전부지만 엄마랑 난 그걸 못 견뎠다. 돈 벌어 오는 건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했으면 하는 것. 거실로 나와 TV라도 보고 산책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빠는 침대에서 시간 죽이기에 진심이다.
아빠의 울증을 두고 엄마는 할아버지에 대한 반항심리라고 했지만, 의사는 호르몬 문제라고 했다. 3남매의 장남인 아빠는 할아버지가 바라는 양반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딴따라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아빠는 약을 먹었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고, 이제는 만성이 됐다.
그렇게 울증이 가면 조증이 온다. 시작은 새벽부터다. 불교대학 우등생이었던 아빠는 사방불을 다 켜놓고 목탁을 쳤다. 나와 엄마는 익숙했지만 와이프는 경기를 일으켰다. 어느 날은 삭발하거나 어느 날은 국수 가게를 차리겠다며 재료를 산더미처럼 사 온다.
울증일 때 에너지를 조증일 때 푸는 식인데, 활동량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생긴다. 잦은 무단결근으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아빠는 돈을 펑펑 썼다. 엄마는 아빠가 다이소에서 이백만 원을 긁었다며 거품을 물었다. 꽤나 자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조증이 더 심해졌다. 부산에 가고 싶다며 한 달에 4번을 부산에 갔다. 당연히 엄마 카드로. 엄마는 그냥 두는 주의다. 말려서 될 사람이 아니라고. 요즘에는 카드를 줬다가 뺏기를 반복하며 타협한 듯하다.
얼마 전에는 낚시에 빠졌다. 하루 종일 낚시터에서 살았고 2~3주가 지났을까. 아빠는 뻗어버렸다. 드디어. 그건 엄마도 같은 마음이다.
아빠는 앞으로도 롤러코스터를 타리라. 그러곤 지쳐 쓰러지겠지.
그래도 다행이라고 느낀다. 생각보다 별일 아닐 수 있기에.
기록이 길이 된다면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