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에서 언급한 단어는 ‘관심’이었습니다.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관심 이야기를 더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 이야기'입니다. 우리 집사가 가장 좋아할 듯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떠오릅니다. 그녀에게 얼굴을 붉히고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좋아했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들었던 그녀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유지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이랬을 겁니다. 그때 그녀가 성대모사를 했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겁니다. “누구냐 넌.”
그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계산대로라면 고백은 성공했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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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을 졸업하고 공업계열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여학생은 10% 정도였습니다. 여학생은 적었지만 제 마음을 훔친 친구는 있었습니다. 편의상 ‘그녀’라 칭하겠습니다.
그녀는 3년 내내 같은 반이었습니다. 예뻤지만 빼어나진 않았습니다. 한눈에 반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얼굴을 본 시간이 길었습니다. ‘단순노출효과’라고 합니다. 자주 보면 사랑에 빠진다는 얘기입니다. 제 얘기였습니다.
고3이 돼서야 제 마음을 알았습니다. 아니, 그전까지는 부정했습니다. 문제는 인지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사회성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덕분에 말도 제대로 섞은 적 없었습니다. 여자랑 말하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블로그에 올린 많은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전 흔히 말하는 ‘연애 고자’였습니다. 공감 능력이 결여됐고, 부작용으로 이성적이기만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울고 있던 같은 반 여자아이가 기억이 납니다. “왜 우느냐”라고 물었습니. 그 친구는 “OOO이 나 때문에 혼났는데 미안해서”라고 답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고 “네가 운다고 변하는 건 없어, 그만 울어”라고 얘기했습니다. 울지 말라는 말이었으니 나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방법이 글러먹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건 먼 훗날입니다.
아무튼 마음은 계속 커졌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말입니다. 친구한테는 말도 못 했습니다. 놀릴까 봐 그랬습니다.
마음 앓이를 하던 제가 생각한 다가가는 방법은 ‘독서’였습니다. 그녀는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랬습니다.
원래 독서를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그녀 취향은 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런 책을 왜 읽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책을 읽기로 마음먹은 후 저는 사서 선생님과 친구가 됐습니다. 사서 선생님은 "매주 5~6권씩 순수문학 소설을 빌려 가는 남학생은 좀처럼 없다"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녀가 읽은 책을 섭렵하다 보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제가 고백했을 때 그녀 표정을 보면 지금도 숨이 막힙니다. '컼'
그녀에게 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왜’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순 없었습니다. 저는 매달렸고, 그녀는 절 차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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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회상하면 ‘왜 독서 따위에만 공을 들였을까’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방법이 많이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 관심이었습니다. 정확히는 ‘관심의 방향’이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관심이 있었던 걸까요? 그녀를 좋아하긴 한 걸까요? 정말 그녀가 원하는 걸 한 걸까요? 결과가 모든 걸 말해주듯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말입니다.
‘좋아하는 이상형’을 만들고 거기에 그녀를 맞추고 있었을 겁니다. 실존하는 그녀가 아니라 상상 속 그녀입니다. 가상 인물을 좋아한 겁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를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녀라면 책 읽는 사람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고, 책을 읽었습니다. 상상 속 그녀를 좋아하는 ‘저’를 좋아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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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나마 왜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독서를 좋아하고, 독서하는 사람을 좋아할 거라는 ‘프레임’을 그녀에게 씌운 걸까요?
글을 쓰고 있는데 집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기 얘기를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글을 쓰다가 잠깐 멈췄습니다. 분명히 제 이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사 눈에는 아니었습니다. ‘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사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듯 모를 듯했습니다.
다시 화면을 봐도 분명 제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선 늘 제가 빠져있습니다. 늘 관찰자 입장인 겁니다. '내가 없는 내 이야기.' 집사가 지적한 부분도 이 부분 일 겁니다. 공감이 안 되는 이유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관찰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대상에 대해 알고 싶었고, 이해하고 나면 뿌듯했습니다. 왜 그랬을까를 고민해 봤습니다. 이해해 주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해받고 싶어서 이해하려 했던 겁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말입니다.
초등학생 때는 종이접기를 좋아했습니다. 색종이로 조랑말이나 소, 딸기, 꽃 등을 접었죠. 특히 3장이 있어야 접을 수 있는 용을 완성한 후엔 뿌듯했습니다. 제가 종이접기를 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엄마에게 자랑하는 일이었습니다. 빨갛고 노란 색종이를 접어 작품을 만들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서 칭찬받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컴퓨터를 하셨습니다. 인터넷 소설을 보셨습니다. 당시에는 ‘궁’이 유행했습니다. 어머니가 저와 형을 키우기 위해선 매일 12시간을 주유소에서 일하셔야 했습니다. 30대 초반이던 어머니는 인터넷 소설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셨습니다.
30이 된 지금은 어머니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울증으로 병원을 전전하시던 아버지와 2형제를 키우기 위해선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저는 색종이를 접으면 늘 어머니께 먼저 보여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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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에서 ‘타르타로스’라는 지옥이 있습니다. 탄탈로스라는 왕이 신들을 시험하다가 괘씸죄로 빠진 곳입니다. 이곳은 무화과가 손 닿을 높이에 있고, 물도 목까지 차있습니다. 하지만 손을 뻗으면 무화과가 저 높이 올라가고, 물을 마시려고 하면 금세 말라버립니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닿을 듯 닿지 않지만 그냥 놔버릴 수도 없는 그런 점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