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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댁 고양이 Apr 21. 2024

그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영은, 2023)


심희가 여자친구인 차영에게 말을 건다. "뭐해?"


차영은 책을 내려놓고 말한다. "책을 읽고 있었어. 요즘 도파민 중독인 것 같아서 좀 벗어나려고. 간만에 문학을 읽으니까 좋은 것 같아."


심희는 차영이 내려놓은 책의 제목을 훑는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무언가 굉장히 서정적인 제목이네. 로맨스 소설이야?"


차영은 책 표지를 한 번 보더니 말한다. "로맨스? 음... 글쎄. 드라마에 가깝지 않을까 해. 그것도 아주 지지리 궁상인 드라마."


"왜, 그런 거 있잖아. 80년대 힘들었던 한국사를 그려낸 것 같은 그런 작품들. 아프고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일부러 들춰내는 그런 책들. 이 책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싶어."


심희는 차영의 얘기가 흥미로웠는지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차영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나간다. "음... 글쎄. 하지만 마냥 슬프고 비참하지 많은 않은 것 같아. 단편집이라서 읽기 편해서 좋았는데.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다 묵직하더라고."


"뭐랄까. 모질게만 느껴졌던 부모님의 아픈 상처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매일 매 맞는 엄마를 보며 '왜 그렇게 살는지' 한심해 하다가, 막상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쩔 수 없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있잖아."


"나는 이 책이 그런 책인 것 같아. 제목처럼 아주 희미하지만 따뜻함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런 책."


심희는 얘기가 더 듣고 싶은지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 하더니 결국 끝까지 읽었나 보네?"


차영은 책의 첫인상을 떠올린다. "맞아, 유혈이 낭자한 스릴러 소설을 보다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골랐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뭐랄까, 이 책은 다른 의미로 자극적이야. 부조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꼬집어주거든. 여성이 겪는 부조리함이 특히 많이 나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폭력을 휘둘러도 떠나지 못하는 여자들도 많이 나오지."


"여자들은 모두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았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우리 엄마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괜히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나온 남자들은 죄다 '쓰레기'들만 나와. 너도 읽어보면 쌍욕이 나올 거야."


심희는 갑자기 열변을 토하는 차영을 보니 잘못 건드렸다 싶다. 하지만 심희는 이미 알고 있다. 차영이는 일단 터지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는걸.


차영이 말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15살이나 어린 고등학생을 꼬드겨 임신까지 시키고, 나이 들고도 그 버릇 못 고치고 학생들이랑 바람이나 피는 인간 말종이 나오는데 이거 확,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리고 책에 왜 그렇게 인간 말종인 남정네들이 나오는지. 우리 아빠는 절대 그렇지 않았거든."


"아니지, 생각해 보니 우리 아빠도 밥 차리기까지 손가락 하나도 까딱 안 했지. 설거지도 안 하고. 스으읍... 이거 안 되겠는데."


심희는 차영이를 진정시킨다. "그래도 아버님이 요새는 잘 하시잖아. 어머님 이것저것 챙겨드리기도 하고."


차영이는 잠시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렇긴 그렇네. 네 말이 맞다. 아빠도 많이 바뀌었어."


"그리고 책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심희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고."


심희가 갑자기 눈을 반짝거린다. "그래? 왜? 이제 알아본 거야?"


차영은 괜히 말했다 싶었지만 기특함을 봐서 얘기해 주기로 했다. "뭐랄까. 너는 정리도 잘하고, 빨래도 잘하고, 뭐든 깨끗하게 쓰고, 나만 보면 살갑게 굴기도 하고, 기분 나빠도 순하고 음... 그래서."


심희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렇지. 생각보다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구나. 기특하네 우리 차영이."


차영은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그렇지? 내가 다 지켜보고 있다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잘 해.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냐?"


심희는 차영의 자기자랑에 익숙하다. 그리고 그 자기자랑이 싫지만은 않다. '그래, 그래도 귀엽네.'




심희는 우쭐해하는 차영을 뒤로하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인다. 비도 오고 날도 우중충하니 '둥굴레차'가 좋겠다.


차영에게 마시겠냐고 물으면 보나 마나 좋다고 할 것이다.


물이 끓을 때까지 시간이 조금 있으니 차영이 읽던 책을 훑어봐야겠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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