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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댁 고양이 May 01. 2024

자기 자리를 아직 모르고 있다면.

설계자들(2010, 김언수)


미니멀리스트인 차영이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다. 심희가 보니 방금 책을 다 읽은 모양. 어떤 책을 읽었던 걸까.


심희가 탁자에 앉아있는 차영의 뒤로 간다.  어깨 너머로 보니 제목이 <설계자들>이다. 무엇을 설계했다는 걸까. 


심희는 차영이 요즘 즐겨보는 소설이 공포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설계자들>의 표지를 보니 공포물은 아니리라.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


차영이 심희가 어깨에 올린 손을 잡는다. "웅. 그냥. 여운이 남는 소설이라 그냥 가만히 있었어. 이거 저번에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인데 제대로인 것 같아."


심희는 차영이 쉽게 감동받는 걸 알지만 궁금해하기로 한다. "아, 이게 그 책이구나. 어떤 게 그렇게 감동적이야?"


차영이 책을 뒤적거린다. "감동적? 글쎄 이것도 감동적이라면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 되게 되게 슬프거든. 음... 그니까, 읽을수록 안타까움이 묻어 나오는 책이야."


"내용은 뭐랄까. 평범해. '푸주'라는 킬러들의 세계를 다룬 이야기라고나 할까? '래생(來生)'이라는 30대 킬러가 주인공인데 소설 전반에 걸쳐 잘못된 결정을 내려. <설계자들>은 그 여정을 그린 책이고."


심희가 차영의 눈을 바라보며 맞은편에 앉는다. "그래?"


차영이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신다. "웅. 설명을 잘 못하겠네. 음... 그러니까."


"래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고아원에 버려지거든. 그리고 도서관에 맡겨져 킬러로 자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푸주에서 일어나는 각종 더러운 일을 겪게 되고. 그런 거 있잖아. 킬러로 쓰임 받고 버림받는 그런 게 일상인 사람들 이야기 말이야."


"그리고 '설계자'는 킬러들이 암살을 수행하도록 계획을 짜는 사람을 말해. 때로는 교통사고로, 사고사로, 자연사로, 때로는 의혹을 만들기 위한 살인으로 보이도록 말이지."


"또 책이 재밌는 게 킬러들의 세계를 근현대사를 한 스푼 섞어서 재미있게 풀어냈거든. 부패한 정부가 더러운 일을 푸주의 킬러들에게 의뢰하는 정황들이 잘 묘사돼 있지."


심희가 차영의 얘기에 책을 훑어본다. 뒷면을 보니 많은 평가가 꽤나 후하고, 외국인 작가들이 많다. 


"그래? 근데 그것만 가지고는 조금 평범한 것 같은데? 영화 <존윅>이나 <길복순> 같은 것도 킬러들의 세계를 다룬 거잖아."


차영이 잠시 뜸을 들인다. "그렇긴 한데 장르가 다른 것 같아. 출판사 <문학동네>는 문학적인 느낌이 강한 소설을 내잖아. <설계자들>은 장르 소설 같지만 내용을 보면 문학이라는 느낌이 들어."


"뭐랄까. 선택의 길에서 늘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을 그린 작품이랄까?"


"안타까움이 오래가는 게 래생에게는 늘 선택할 기회가 있었거든. 본인을 사랑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마지막까지 래생은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어."


집중하는 심희의 눈이 심상치 않다. "그런데?"


차영이 식탁 옆에 둔 작은 액자로 눈을 돌린다. 액자에는 심희와 차영이 바보같이 웃고 있다. "래생은 '익숙함'을 선택해. 행복해질 수 있는 새로운 기회보다."


"행복을 맛보고 새로운 기회를 택했다가도 곧바로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 사람이 쓰이고 버려지는 곳, 푸주로 말이야."


"스물두 살의 래생이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나고 행복할 기회를 잡았을 때는 나까지 설렜어. 래생도 흔들렸지. 하지만 그게 다였어. 래생은 푸주로 돌아가."


"푸주가 래생에게 주는 건 비참함 밖에 없어. 그저 언젠가 죽겠지만 당장은 살아갈 수 있다는 그런 비참함이랄까? 래생도 자신이 언젠가 버려질 거란 걸 알고."


"래생이 왜 그런 선택을 반복했을까를 고민하게 돼. 래생에게는 진짜로 선택할 기회가 있었거든. 푸주에서 래생을 놓아주기도 했고. 그래서 조금 슬펐어."


심희와 차영 사이에 조금은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심희는 차영이 그런 얘기를 싫어하는 걸 알고 있다. 비관적이고, 냉소적이고, 세상의 힘듦을 다 짊어진 척하면서 회의적인. 그런 이야기 말이다.


심희가 입을 뗀다. "그렇구나. 그러네. 슬픈 얘기야."


차영이 심희를 바라본다. "난 사람은 언제나 변할 수 있다고 믿어. 실수를 반복할 순 있지만 그게 변하지 못한다는 이유가 될 수 없어."


"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힘들 수 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발버둥을 치다 보면 언젠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고."


"삶에 만족하지도 못하고 변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면 힘이 빠지는 것 같아. 이 책이 그래. 분명 좋은 책이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야."


"힘들면 쉴 수 있지만... 음... 힘든 사람은, 정말 일어설 힘조차 없는 사람은 그럴 수도 있는 걸까?"


심희는 차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다. "글쎄. 일어설 힘이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야. 일어설 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일어서야 하는 이유도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


"자기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난 지금 그대로의 자기가 좋아."


차영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심희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허, 자기 잘 빠져나가는구나."


심희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곧 <눈물의 여왕> 할 시간이다. "ㅎㅎ. 난 자기가 제일 좋다니까? 진짜야 믿어줘. 어맛, 벌써 시간이. 김수현 보러 가야겠다."


심희는 <눈물의 여왕>이 재밌다고 했다. 


백현우는 자기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고 있다. 

그리고 늘 홍해인에게로 돌아간다. 

누가 어떤 식으로 방해하든.

백현우는 홍해인의 옆으로 간다.

깊게 생각할 거리도 없다.

그리고 심희는 그게 <눈물의 여왕>이 재미있는 이유라고 했다.


백현우는 자기 자리를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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