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2021)
"그 책 되게 얇네?" 심희가 옆에 누워 책을 읽는 차영에게 말한다.
차영의 손에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들려있다. "응, 이게 요즘 베스트셀러 1위잖아. 도서관을 뒤졌더니 꽤 있더라고."
심희가 베스트셀러라는 말에 표지를 유심히 살핀다. "그래? 판타지나 스릴러는 절대 아닐 것 같고, 무슨 내용이야?"
차영이 고개를 돌려 심희를 본다. "음... 뭐랄까 따뜻한 데 조금 시린 얘기야. 너무 추상적인가?"
"1980년대 아일랜드의 풍경을 그리면서 그 안에 있는 부조리함을 담아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지."
"어떤 부조리냐면, 당시 성당에서 비일비재했던 아동 착취에 대한 내용이야."
심희의 눈이 커졌다. "그래? 갑자기 확 무거워지네. 근데 그렇게 얇아?"
차영이 책으로 다시 시선을 옮긴다. "웅, 그러니까. 근데 이 책만 봐도 성당에서 행해졌던 내용들이 상상이 되고 그런 것 같아."
"책에선 당시 착취에 대해 엄청 디테일하게 다루진 않아. 근데 따뜻한 아일랜드 도시 풍경과 대비되면서 그 시림이 극대화되는 것 같아."
"말하자면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거지."
심희가 차영의 손에서 책을 가져온다. "아, 그래? 그래서 베스트셀러 1위인가?"
차영이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린다. "글쎄, 그것 만으로는 조금 애매한 것 같아. 이런 책은 많이 있거든. 그리고 이 책 엄청 짧잖아."
"나도 '단편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드문 케이스'라는 말에 눈길이 가기도 했고, 무엇보다 읽으면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
"이 책의 주인공, 생각보다 애매한 어린 시절을 보냈거든."
심희가 책에 있던 시선을 차영에게 돌린다. "불우하면 불우했지, 애매한 건 뭐야?"
차영이 심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마냥 불우한 것도 아니고, 마냥 행복했던 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래."
"주인공인 '빌 펄롱'은 어머니가 16살에 임신을 해서 집에서 쫓겨나, 그리고 어머니는 다행히 부유한 과부 윌리엄스 부인의 집에 식모로 살지. 하지만 그 집주인은 펄롱을 아주 귀여워했고, 손자처럼 키웠어."
"펄롱은 좋은 아버지가 됐고, 가정적인 아내와 결혼해 예쁜 딸도 5명이나 낳았지. 그리고 책 곳곳에 펄롱이 얼마나 괜찮은 어른인지도 나와있고."
"하지만 펄롱은 아버지가 누군지 마지막에야 알게 됐고, 윌리엄스 부인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도 못 해. 잘못한 건 아니지만 잘한 것도 아니지."
심희가 말한다. "정말 애매하네. 그치?"
차영이 심희를 쓰다듬는다. "그렇지."
"책이 짧아서 그런지 생각할 게 많아. 300쪽짜리 책이라면 100쪽은 작가가 쓰고, 남은 200쪽은 독자가 완성하는 느낌이랄까?"
"의도적으로 여백을 준 게 아닐까 싶어. '그다음은 독자의 몫이에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
"작가의 바람대로 이 책은 유명해졌고, 아일랜드에선 국민 도서로 읽힌데. 지구 반대편 한국에 있는 나까지 읽었으니 말 다 한 거지."
심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책날개의 설명을 훑는다.
차영이 다시 천장을 바라본다. 인테리어용 알전구에서 나온 주황빛이 천장에는 퍼져있다.
"책은 이렇다 할 사건과 해소가 없는 열린 결말이지만. 이 책을 보니 왜 열린 결말이 필요한 지 알 것 같아."
"펄롱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었고, 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으니까."
심희는 이미 눈이 반쯤 감겼다. 차영은 책을 치우고 이불을 덮어준다.
"네가 있으니 나도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을 거야." 차영이 심희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