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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댁 고양이 May 09. 2024

결혼이 이혼의 전제조건이 되려면.

이야기의 핵심 (리비 호커, 2022)


차영은 오늘 혼자다. 남편인 심희가 친구들과 캠핑을 갔기 때문. 심희에게 아까 연락이 왔지만 왠지 탐탁지 않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만.


오후 8시. 집 근처 공원에 나왔다. 200m가 조금 넘는 트랙에는 여름을 대비해 살을 빼려는 사람들이 조깅인지 워킹인지 모를 운동을 하고 있다.


계속 걷기만 하는데 러닝벨트부터 조깅화 머리띠까지 풀세트로 갖춘 사람도 있고, 허름한 복장으로 몇 바퀴째 쉬지 않고 뛰는 사람도 있다. 차영은 설렁설렁 걷는 부류.


노래를 들을까 하다가 사색에 잠기기로 한다. 심희가 없는 순간은 차영이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심희가 있는 동안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니까.


취미로 소설을 쓰고 있는 차영은 소설을 쓰는 것만큼이나 이론 공부에도 진심이다.


<이야기의 핵심>. '리비 호커'라는 미국 작가가 쓴 책이다. 최근 차영이 재밌게 읽은 책. 그리고 읽고 난 후 숙성이 필요한 책이다.




저자는 3주 만에 장편소설의 초고를 완성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탄탄한 플롯이 있다. 플롯은 언제든 변화를 줄 수 있지만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그리고 핵심은 플롯에 대한 이해다. 영웅의 서사를 플롯에 어떻게 녹여낼지가 저자가 말하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인물과 결핍, 즉 '캐릭터 아크'를 잘 활용하면 재미없는 소설을 만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핍은 욕구를 만들고, 캐릭터의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하며, 그 개연성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또 이는 책을 아우르는 하나의 주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빌런은 물론 주변인물 또한 결핍이 있으며 이를 얼마나 잘 보여주느냐가 재밌는 소설의 가르는 기준이다.


이 과정에서 모든 사건은 필연적이어야만 하며 결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야 한다. 결핍을 보여주겠다고 결말과 필요 없는 사건을 넣으면 루즈해진다는 말.




차영이 걷기를 멈췄다. 트랙 가운데서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아버지와 젊은 여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그냥 지나치려고 해도 트랙은 그렇게 넓지 않다.


차영은 멀찍이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이 정도라면 싸움 구경을 해도 눈에 띄지 않으리라. 애초에 누가 보는 게 싫다면 공공장소에서 저러고 있진 않겠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갈등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서로의 결핍과 이로 인한 욕구가 충돌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욕구가 충돌한 두 사람은 필사적이다. 둘 다 간절하기 때문일까?


<이야기의 핵심>에서도 주인공은 결핍을 메꾸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성장하면 영웅이 되는 것이고, 성장하지 못하면 비련의 주인공으로 끝난다.


성장하기 위해선 결핍을 마주해야 하고, 마주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극복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은 필연적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통해 배우느냐, 못 배우느냐는 결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다툼을 벌이는 두 남녀가 갈등을 통해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다면 저 둘에게 성장은 없으리라.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다. 심희가 사진을 보냈다. 사진에는 남정네 4명이 맥주를 들고 신난다는 듯이 웃고 있다. 차영은 친구가 부질없다고 생각하지만, 심희가 조금 부럽다.


잘 놀다 오라는 메시지와 함께 웃는 강아지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트랙 저편으로 시선을 옮긴다. 대치하던 남녀의 갈등이 일단락된 듯 각자 길을 가고 있다.


할아버지는 모르겠지만 여자 쪽은 집에 가면 분명 이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들 것이다. 심희가 내게 문자를 보낸 것처럼.


심희가 친구들과 싸웠다는 얘기는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만 저 여자는 어떨까? 누군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할 테지.


리비 호커는 '조력자의 역할'을 두고 인상적인 말을 했다. 빌런보다 때로는 더 가혹한 게 조력자라고.


조력자는 주인공이 자신의 결핍을 직면하게 하고, 나아가 이를 극복하게 한다. 주인공이 이를 얼마나 힘들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저 여자의 얘기를 듣고 누군가가 바른 소리를 했다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가 손절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그리고 우리 사회에 영웅이 없는 이유는 별개 없다. 나라고 다를까.


심희는 분명 조력자다. 내게 있어 둘도 없는. 심희가 나를 후벼 파는 말을 했던 적이 있던가 떠올려 본다. 늘 눈치를 보며 말을 삼키는 걸 몇 번이나 봤다. 그런 심희가 고마울 때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심희를 만나 성장했던가?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보다 화도 덜 내고, 덜 예민하게 구니까.


심희는 말하지 않고 내가 내 결핍을 보게 하는 방법을 아는지도 모르겠다. 늘 그의 앞에선 나는 화가 많고 예민하니까.


나는 그가 좋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심희는 내게 변화가 보이면 늘 칭찬해 줬고,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보름달 빛이 트랙을 환하게 비춘다. 사람들이 이제 몇 안 남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11시. 이제 슬슬 집에 가야겠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냥 놀게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만에 휴가겠는가. 이 예민한 사람에게로부터.


길이 밝아 괜찮을 것 같다. 혼자서 가야 하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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