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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댁 고양이 May 24. 2024

‘재미’를 잊어버린 사람에게.

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1994)


 침대에서 책을 보던 차영(30, 여)이 식은 땀을 흘리며 책장을 덮었다.


옆에선 남편 심희(32, 남)가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다 차영을 바라본다. "괜찮아?"


차영이 이불을 끌어 올린다. "괜찮은 것 같기도. 그것보다 이 책 1994년 쓰였거든, 나 태어났을 무렵인데 엄청 재밌어. 그리고 엄청 세련됐어."


"아니, 세련됐는지는 모르겠네. 아무튼 엄청 쉽게 읽히고 모든 장면이 선명하게 그려지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반응과는 영 상관없어보이는 아내의 연이은 감탄사에 심희가 고개를 돌린다. "내가 죽은 집? 뭐, 호러 소설이야?"


차영이 말한다. "응. 근데 이 책도 좀 신선해. 등장인물이 둘 밖에 없거든. 주인공과 주인공의 전 여자친구."


"아닌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이 4~5명 나오긴 하네. 아무튼 등장인물은 2명이야."


"그리고 책을 보니까 히가시노는 역시 사람이 무엇을 재밌어하는지 제대로 아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이 책은 아주 정직하게 그 길을 따라 걷는 그런 소설이고."


잠자코 듣던 심희가 눈을 반짝인다. "어떤 게 그런데?"


차영이 말한다. "그니까.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은 기억을 잃은 여주인공이 기억을 찾기 위해 어떤 집으로 가는 내용이거든. 전 남자친구와 함께 말이지. 이미 결혼한 주제에 말이야."


"하지만 여주인공이 멀쩡히 살아있는 남편을 두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잘 설명해 줘. 여주인공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거든. 바로 아동학대야."


"본인이 당한 게 아니라 자기 딸에게 아동학대를 하는 입장인 거지. 본인도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지만 이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불쌍하게 전 남자친구하게 부탁하게 돼. 그리고 그 후에 있게 되는 여정이 이 책의 기본 서사지."




차영은 늘 마이페이스가 강하다. "자기야, 사람이 무엇에 재미를 느낀다고 생각해?"


심희가 뜬금없는 차영의 질문에 잠시 고민한다. "글쎄? 생각해 본 적 없어서. 자기가 좋아하거나 잘하는 걸 하면 재밌어하지 않을까?"


차영이 말한다. "그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더 근본적인 게 있지 않을까 싶어. 자기를 가둬놓고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하루종일 시키면 과연 재미있겠냐는 거지."


"처음에는 그럭저럭 하겠지만 결국 재미에 끝이 있을 거라 생각해. 잘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특히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어. 이 책, 장르가 호러소설이잖아.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엄청 재밌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오싹한 것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재미있다는 느낌이 컸지."


"그 이유가 뭘까 고민을 해봤는데, 아마 난 그게 '성장'에 있지 않을까 해. 사람이 무언가를 겪고 외적이든 내적이든 성장하는 거 말이야."


"특히 <옛날에 내가 죽은 집>에서 여주인공은 모든 진실을 깨닫고 그동안 미뤄뒀던 결정을 내리게 되거든. 그게 좋고 나쁜지는 2차적인 문제지만."


"장르가 호러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주인공은 전 남자 친구인 주인공의 도움으로 멋지게 성장하지. 또 자기의 아픈 과거를 직면하게 되고."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과정을 설득력 있게 잘 쓴다는 말이지. 난 그게 호러 소설을 보면서 재미를 느낀 이유가 아닐까 싶어."


"결핍과 도전 그리고 성장(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영웅의 서사'를 소설에 잘 녹여내는 거지. 호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심희가 책을 유심희 살핀다. 대체 무슨 얘기를 써 놓은 걸까.


차영이 말한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사람은 성장에서 재미를 느끼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것도 혼자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는 거 말이야."


"전 남자 친구인 주인공이 사이드 캐릭터인 느낌이긴 하지만 주인공도 소설이 진행되면서 자신의 결핍을 직면하게 되거든. 그리고 어른이 되지."


"사실 자기의 부족한 걸 돌아보는 게 쉽냐마는 그걸 보지 않고는 성장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 아닐까 싶어. 그렇기에 도움이 필요한 거고."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우쭐해하는 심희가 귀여운 차영. 괜히 머리를 쓰담쓰담한다. 심희는 얌전히 귀여움을 받는다.


차영이 눈을 감고, 심희를 만나기 전 자신을 돌아본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심희는 사실 차영의 과거를 알고 있다. 차영은 늘 시니컬하고, 한 발 물러서 있고, 다가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차영은 예뻤지만 성격이 드셌다. 지금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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