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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여름 Aug 17. 2023

아줌마의 유학일기

나는 용감한 사람입니다.

 2007년 2월 25일 밤늦게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의 차가운 공기를 그새 잊고, 훅~치고 들어오는 필리핀의 한여름 밤공기를 맞이했다. ‘아! ~어, 두텁고 둔탁한 윗도리를 어쩐단 말인가! 할 수 없지 않은가.’ 벗자니, 들 손도 여의치 않고, 딸려 있는 아들도 버겁다. 짐도 무겁고 벌써 지치는 걸 보니 외국 생활이 드디어 시작되나 보다….

  캐리어를 찾아 공항 로비로 나오니 많은 여행객이 자신의 이름이 쓰인 메모 보드를 찾느라 서성인다. 하지만, 난 오롯이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일단 공중전화 카드를 사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주자. 아마 오만 걱정을 하고 있겠지. 그리고는 공항 쿠폰 택시를 타자. 예약해 둔 ‘에어포트 호텔’로 가자고 해야지.’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마쳤다. 돌격 앞으로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일본사람이랑 합승해도 되냐고 묻는다. “of course” 


 행선지가 같았던 일본 남자랑 함께 택시를 타고 2 터미널로 향했다. 호텔은 2 터미널 안에 있었다. 1층 식당가는 밤이 늦었음에도 영업 중이었다. 짐을 풀고 KFC에서 식사를 했다. 치킨 한 조각, 스파게티 그리고 아이스티 한잔 889페소 한국 돈으로 18,000원쯤 된다. 프랜차이즈 음식값은 우리랑 비슷하거나 싸다. 망고젤리랑 물을 사서 배정받은 방에 열쇠를 들고 올라왔다. 필리핀은 핸드폰 공 기계를 사서 금액대별로 유심카드를 사서 끼워서 쓴다. 노이카 핸드폰이 주로 쓰이는데 가볍고 심플하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노이카 공 기계를 사야지. 그리고 유심칩도 사야겠다.” 중얼거리면서 잊어버릴까 봐 기록해 두고 잠을 청했다.      

 드디어 2월 26일 월요일이 밝았다. 호텔이라고 해봤자 베드 하나에 작은 욕실 하나였다. 터미널 내에 있는 비즈니스호텔이 거의 다 비슷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간 엄마는 어디를 가도 불안하고 치안이 걱정됐다. 무사히 잘 자고 아침이 밝아 왔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짐을 꾸려 나오는데 아들 녀석이 호텔 로비에서 레고 가게를 봤단다. 거기 가서 새로 나온 신형 레고를 사달라고 한다. ‘뭐 여기까지 와서 레고를 사려고 할까?’ 싶다가도 사러 간다. 결국 갈 줄 알았다. 좀처럼 떼를 쓰거나 조르지 않는 녀석이 저러는 걸 보면 진짜 갖고 싶은가 보다. 아이코! 599.75페소…. 한국보다 더 비싸다. 아깝다. 하는 수 없이 샀다. 엊저녁 들렀던 KFC 가서 또 치킨을 먹고 아이스티를 마시고 어학원 매니저랑 만났다. 빌리지로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노이카 핸드폰을 2,150페소를 주고 샀다. 예약한 빌리지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주인은 멕시코계 필리피노였다. ‘미세스 양’이라고 불러 달란다. 알았다고 했다. 계약서를 쓰고 (짐이라고 해봐야 캐리어 하나지만) 이것저것 생필품을 사야 했다. 당장 마실 물도 없었다. 애 딸린 유학생으로 정말 변신하기 위해 이것저것 마음의 준비와 물건을 갖춰야 한다.


 옆방 사는 여자의 소개로 로빈슨이라는 대형 마트로 갔다. 싸구려 물건이 산처럼 쌓여 있다. 약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아무튼 생선이 많고, 육고기가 많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필리핀은 가게에서 생선을 토막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도 모르고 점원에게 생선을 토막 내 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타갈로그어(語)를 아예 모르고 그 사람은 영어를 몰라, 둘 다 웃기만 한 채 각자의 말로 알 수 없는 대화를 했다. 나는 세 토막으로 잘라 달라고 보디랭귀지로 말했다. 그것도 엄지, 검지, 중지 세 개를 펴서 삼을 강조하며 말이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그 녀석은 내게 생선을 세 토막으로 잘라 주었다. 씩 웃으면서 속으로는 욕했겠지….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다. 당연한 줄 알았으니까…. 내가 갑질을 한 셈이 되었다. 


 수건을 사고, 식료품, 그리고 노트와 필기구 슬리퍼를 샀다. 택시를 타고 블루워터 빌리지로 돌아왔다. 그 후로 난 좀처럼 택시를 타지 않았다. 지프니와 트라이에 비해 택시비는 10배가 넘었다. 그래서 그나마 안전한 트라이시클을 타고 다녔다. 우리는 그걸 그냥 트라이라고 불렀다, 트라이는 오토바이 옆에 좌석을 달아서 4~5인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인데 보통 2~3인이 탄다. 승차감은 좋지 않고 속도도 느리지만 어학원과 빌리지를 다니기엔 적합했다. 금액도 250원이면 탈 수 있어서 참 좋다. 지프니는 미군이 남겨 두고 간 지프차를 개량해서 만든 대중교통수단인데 아들을 데리고 타기에는 위험하고 불편했다. 손을 들고 타야 하며 올라타기에도 많이 불편했다. 창문도 없고, 매연이 매우 심해서 마스크나 수건이 있어야 숨을 쉴 수 있을 정도였다. 가격은 200원이라 매우 싸지만, 치안도 걱정되고 가방이나 핸드폰을 도난당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로 트라이시클을 이용했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자라면서 나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어른의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용감하다, 나는.’ 뜬금없이 ‘용감’이라는 단어를 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필리핀은 수업이 끝나면 후다닥 빌리지로 가야 한다. 치안이 약한 도시여서 조명도 없고, 네온은 더더욱 사치다.   그날은 나가야 하는데도 꾸물거렸던 통에 아들과 지프니를 타고 빌리지로 가야 했다. 트라이도 잡히지 않아 마뜩잖은 상황에 놓여 택시를 탈까 하다가 지프니를 탔는데 기사 녀석이 이상한 곳으로 계속 간다. 아마 손님이 없었던 터라 그날 공을 친 모양이다. 한국 사람이 많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손님을 태울 심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설사 내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때부터 나는 떨리기 시작했다. 아들이 눈치라도 채서 불안해할까 봐 의연하게 평상시처럼 굴었다.     

 “엄마 많이 무서워요?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요”

  토닥이며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렇구나. 내가 들켰구나. 머쓱한 김에 털어놓았다.


  “엄마 조금 무서워”

  그랬더니 그런다.


  “엄마 저 아저씨 봐봐요. 엄마가 잔소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을걸요? 속으로 무서울 거야. 아마... 엄마는 용감하잖아요!”

 그렇게 말하곤 계속 웃었다.


 나의 잔소리가 필리핀에도 소문이 다 났나 보다. 내가 용감하다는 것도.     

이렇게 좌충우돌 필리핀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Iloilo City (일로일로 시티)


필리핀 중부, 파나이 섬 남쪽 기슭에 있는 항구 도시. 필리핀 제2의 무역항으로, 건물이 밀집한 도심과 어려 개의 광장 및 시장이 갖추어져 있다. 필리핀 명문대학 UP 대학과, 명문 사립 CPU 대학을 비롯한 40여개의대학이 있디. 필리핀 최대의 교육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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