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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여름 Nov 14. 2023

라면에 대한 단상

젊은날의 초상

‘불가능한 일은 없다’라는 말, 멋지지만 맞진 않는다. 인생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많다. 노력한들 내가 우상혁처럼 높이뛰기를 잘하겠는가 신유빈처럼 탁구공을 다루겠는가? 그렇듯 라면이 내게 그렇다. 소화도 잘 안되고, 조미료투성이인데다가 국물은 너무 짜서 건강에 해롭다. 흔히 그런다. 국수를 튀겨서 만들어 놓은 짠 음식일 텐데 그냥 국수를 먹으란다. 아! 모르는 소리 마라. 국수와 라면은 내게 쓰이는 역사가 다른 음식이니…

 

대학교를 들쑥날쑥 다녔던 나는 친한 동기가 많지 않다. 하긴 정식대로 쭉 다녔던 중고등 친구도 별로 많지 않은 걸 보면 교우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탓도 있겠다. 공강이 있는 시간이면 복지관 지하 식당으로 달려가라면 한 그릇 후루룩하는 그것이 행복이었다.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혼자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대학교에서의 라면은 눈에도 띄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안성맞춤의 시간이며 공간이다. 거기에는 정말 특별한 것이 있다. ‘김 가루’ 난 김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동생이 “밥이랑 김만 줘도 내내 먹을걸?” 한 적이 있으니까 알만하지 않은가?

 

라면에 김 가루를 얹는다. 단무지 수북하게 접시에 담는다. 접시라고 해봐야 끝이 미세하게 너덜거리는 지금으로 치자면 미세화학 호르몬이 나올 것 같은 상태지만 그래도 좋다. 물론 건더기는 남기겠지만 국물만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게 그릇마저 들이킬세라 코를 박고 마시겠지. 글을 쓰는 지금 순간에도 생각하니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바쁘게 살다가도 복지관 라면 맛을 생각하면 피식 웃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라면 맛이 엄청나게 맛있었을 리가 없다. 가격을 맞혀 내느라 라면도 싼 걸 샀을 것이고 조미된 김의 질도 낮았을게 자명하다. 단무지 역시 영세한 공장에서 조금은 대충 만들었을 것이 합리적 의심이며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더라도 나는 역시나 그 라면이 세상 최고의 맛이다.

 

20대 후반의 나는 라면만큼이나 이문열 작가와 박경리 작가를 좋아했다. 새해 아침을 온기 없는 호텔 방에서 책을 읽는 냉기 없는 ‘이성의 방’을 좋아했다. 행위 주체자인 나를 사랑했다. 그렇다고 나르시시즘이나 공주병 정도로 치부하지는 말자. 그런 호사를 누리기 위해 적금통장을 가졌다고 한다면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게 나다. 스물일곱이 들기 전 2005년 연말이 기억에 선명하다. A2 치수는 족히 될만한 커다란 서울 전도를 펴고 이태원이나 남산 근처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호텔을 예약하고 기차표 예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생이 추천해준 호텔로 정했다. 단순하게 이름이 멋있다는 이유였다. 저나 나나 알지 못하는 서울호텔이 그냥 이름이 멋있으면 된 거지. 

 

도착한 호텔은 이름만큼 멋있게 근사했다. 새해 전날 세상은 조용하며 쓸쓸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결혼 준비로 집안이 떠들썩하게 분주했고, 걸리적거리던 차에 내가 핑계를 냉큼 물어 떠나온 새해맞이 길은 자유롭고 행복했다. 그러나 복병이 생겼다. 전날은 그럭저럭 다녔으나 새해 아침 식당이며 어디며 문 연 곳이 없네? 이태원에서 한 군데 레스토랑을 찾았다. 2층 계단을 오르며 두근거렸다. 길거리에서 아사(餓死)할 판이다. 

“계세요?”

영업장을 들어가며 ‘계세요?’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다. 혼자 구시렁댔다.

“들어와요. 학생. 학생 맞지? 아닌가? 아무튼 컴~~온”

그러고는 연신 혼자 신이 났다.

“나 오늘 진짜 심심할 뻔했거든. 갈 곳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어서 문 열었는데…. 고마워”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했다.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까? 더 어렸을 것이다. 

“우리 아침 먹고 수다 떨래요? 나 라면 좋아하는데. 괜찮아요?”

 

‘암요...’

 

“네 저도 좋아해요.라면”

 

복지관 라면만큼이나 맛있던 그녀의 라면은 뭐랄까 근사하고 훌륭했다. 엔틱느낌 물씬 풍기던 그 가게에는 프랑스 어느 귀족이 살았을 것 같은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다. 싸구려 같지 않은 접시에 포크, 거기에 키친 크로스마저 내 마음에 들던 그곳에서 우리는 라면을 먹었다. 퐁듀가 어울릴 것 같은 볼에 라면을 담고 단무지는 치즈 조각을 넣는 그릇에 담아 내왔다. 젓가락은 가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냅킨은 프랑스 국기가 찍힌 예쁜 삼각형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키아누 리브스가 나왔던 ‘구름 속의 산책’ 영화가 떠올랐다. 잔잔하고 평화롭고 행복했던 느낌. 지금 와 생각하면 ‘그녀의 번호를 챙겨 받아 놓을걸’ 하는 후회를 한다. 그땐 부끄러웠다. 나이도 한참 많은 어른한테 전화번호를 물어본다는 게 실례일 것 같고 되바라진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 거리 그곳 다시 가보고 싶지만, 벌써 25년이나 훌쩍 지났다. 최대의 만찬으로 내 스물일곱을 열어 준 그녀에게 사랑을 전하며 무엇보다 최고로 애정으로 하는 음식인 라면을 아름답게 차려줘 너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녀가 뒤축 없는 슬리퍼를 끌고 검 씹으면서 “뭐 마실래요” 했더라면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 DNA를 타고났다. 그래서 ‘밥심’으로 산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난 ‘라면 힘’으로 산다. 여행 다녀와서 속이 훌렁한 날에는 김치 넣고 라면 하나, 속상한 날 집에 들어와 라면 하나, 거실에서 불을 꺼놓고 텔레비전 보며 라면먹기, 머리 안 감은 토요일 오전 만화 보며 라면먹기…한참이나 열거할 수 있지만 이쯤에서 관두기로 하자. 밥을 포함한 음식은 사랑이며 만족이다. 엄마가 끓여주시던 청국장, 친구랑 나누어 먹던 에이스 크래커, 언젠가 만났었던 남자 친구와 마셨던 에스프레소…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먹고 나누는 음식으로 성장했다. 엄마가 해 주는 음식을 먹고 자랐고, 사서 먹고 나눠 먹었을 것이다. 이제는 누가 해주는 음식이 아니라 내가 나를 키워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소고기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라면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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